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바로 진학하지 못했다.
“광주여상 야간은 보내주겠다.” 라는 아버지의 뜻과 달리 난 끝까지 인문고를 고집했다. 결국 살레시오여고 합격통지서를 손에 쥐었다. 하지만 임시소집일 첫날 같은 학교로 배정받은 중학교 친구들과 살레시오여고 문턱을 넘어본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진학을 못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학교로 향하는 동안 열심히 수다를 떨며 웃고 있는 친구들의 밝은 얼굴을 바라보는 심경이 복잡했다. 어설픈 자존심 때문에 “학교에 같이 다니지 못한다.” 라는 말을 끝내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다. 마지막 교복 세대였기에 교복을 입은 친구들이 부러웠다. 학교를 보내주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어린 마음에 산처럼 쌓여만 갔다.
언니는 부산에 있는 신발공장에서 일하며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상고 야간을 보내주는 회사였다. “일이 너무 힘들다.”면서 언니는 나를 부산에 데려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언니에게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내가 고등학교 진학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구질구질한 집이 싫었다. 학교에 보내주지 않는 아버지가 미웠다. 엄마의 미안하다는 말도 지겨웠다. 내가 고등학교를 보내 달라고 우기면 다음 해에 남동생의 고등학교 진학이 어려웠다. 나는 공부에 별로 소질이 없었다. 어쩌면 머리 좋은 동생에게 학교를 양보하는 것이 맞는 선택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린 나에게 가난은 양보를 가장한 또 다른 폭력의 현장일 뿐이었다.
언니가 다니던 회사는 광주 촌사람인 나에게는 어마어마하게 커 보였다. 그 당시 부산에 있던 신발회사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회사에는 학교에 가기 위해 전국에서 여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나처럼 상급 학교를 진학하지 못한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도 있었고 연합고사에 떨어진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위해 오기도 했다. 각자의 사연을 안고 모여든 각 지방의 소녀들은 담쟁이 넝쿨처럼 서로의 연약함을 의지하며 천천히 삶의 무게를 배워갔다.
내가 다니던 구포 여상에는 오전반과 야간반 그리고 특별학급으로 우리처럼 주경야독 하는 반이 있었다. 특별학급에는 모두 다섯 개의 반이 있었다. 지금은 역사 속에 사라진 국제상사에서 두 반, 우리 회사에서 두 반 마지막 한 반은 작은 회사들이 서로 모여서 한 반을 이루었다. 회사별로 반을 편성했기에 한 번 편성된 반은 삼 년 동안 같은 반이었다. 한 반에 오십 명은 넘었던 거 같다.
우리는 오전반이 쓰던 교실을 저녁에 사용했다. 그래서 사물함에 개인 물건을 두거나 책상 서랍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때도 엉뚱한 데가 많았던 나는 책상 서랍에 쪽지를 남겨두기도 했다. 가끔 답장을 남겨주는 오전반 친구도 있었다. 쪽지 답장을 받은 날은 뛸 듯이 기뻤다. 하지만 책상 자리를 매주 옮겨 다녀서 오전반 친구들과 쪽지만으로 친해지기는 어려웠다.
수업 시간은 평일에 네 시간이고 토요일에는 세 시간 수업이 전부다. 하지만 온종일 공장에서 힘들게 일하고 온 우리는 수업 시간에 눈뜬 아이들보다 눈 감고 조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선생님들도 꾸벅꾸벅 열심히 인사(?)하고 있는 우리에게 크게 화내지는 않으셨다. 선생님 중에는 대학원 공부하는 분도 계셨고 원광대를 다니는 분도 있었다.
“선생님도 일하면서 공부하고 있으니 우린 닮은 데가 많은 거 같구나. 서로 꿈을 포기하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자.”라며 우리를 격려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공장 생활은 십 대의 소녀들이 감당하기에 쉽지 않았다. 입학은 같이했지만 몇몇 친구들은 적응하지 못하고 고향 집으로 돌아갔다. 일은 힘들고 먹는 것마저 부실해서인지 결핵을 앓아 약을 한주먹씩 입에 넣으며 견디다 결국 학교를 떠나는 친구도 있었다. 졸업장만 받으면 다 같이 집으로 돌아가자고 약속하며 삼 년을 서로 의지하던 소녀들은 졸업식 날 많이 울었다. 아마도 우리가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던 그 눈물은 유난히도 차갑고 매서웠던 부산의 바닷바람 탓만은 아니었으리라.
거의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우리들은 퇴직을 하면 기숙사에서도 퇴거해야 했기에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많은 친구들이 고향으로 떠났다. 상과였기에 졸업과 동시에 거의 취업을 선택했다. 대학을 간 아이는 몇 명 없었다. 뿔뿔이 헤어지면서 우리가 주고받을 수 있었던 것은 서로의 고향 집 주소뿐이었다.
그때 그 시절 친구들은 지금도 어느 하늘 아래서 씩씩하게 자신 앞에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으리라 짐작해 본다. 가끔은 나처럼 깊이 패인 세월의 흔적 사이를 추억이란 이름으로 더듬거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이름도 얼굴도 희미해진 친구들이 많이 그립다.
“구포 여상 특별학급 22반 친구들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