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약속

by 김은하

무등산이 보인다. 뭉게구름이 산을 에워싼다. 광주 땅을 내려다보며 산은 오늘도 말이 없다. 산처럼 묵직한 것이 가슴 한구석을 눌러 온다. 내 어머니도 말씀이 적은 분이셨다. 백 마디 말보다 말 없는 행동을 우리에게 보이셨다. 철없던 작은 딸이 동갑내기 장남에게 시집을 간다고 하니 걱정이 많으셨다. 어머니 눈에도 내가 큰며느리감은 아니었으리라.

결혼식 전날, 어머니는 집 떠날 준비에 바쁜 나를 조용히 부르셨다.

“은하야! 여기 앉아 봐라.”

평소와 다른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 무조건 집중하는 것이 우리 남매 들의 묵시적 합의였다. 조용한 성품이셨지만 안색이 달라지면 감정의 변화가 있다는 신호다.

들뜬 마음으로 어머니 앞에 마주 앉은 나에게

“엄마한테 몇 가지 약속을 해 다오.”

하시며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 올려 주셨다. 어머니가 나의 다짐을 받고자 했던 첫 번째 약속은 “시부모님을 공경해라.”였다.

“시집을 가면 이제 네 부모는 시어른이시다. 시부모님을 친정 엄마 아빠처럼 모셔라. 자식에게 나쁜 일을 시키는 부모는 이 세상에 절대 없으니 항상 시부모님 말씀에 순종해라.” 하는 설명을 덧붙여 주셨다.

두 번째 약속은 “형제들 우애를 깨뜨리는 짓은 절대 하지 마라.”였다.

“여자가 남의 집 며느리로 들어가서 그 집 형제들 이간질하는 짓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하고 당부하셨다. 세 번째 약속은 “여자는 놀더라도 부엌에서 놀아라.”였다.

“시집을 가면 엄마가 있는 친정과는 다르단다. 지금처럼 네 방으로 바로 들어가지 말고 항상 부엌으로 먼저 들어가라.” 하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엄마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냐?” 하고 재차 묻는 어머니에게 “응 알아. 다 알아먹었어. 나 잘할 수 있어.” 하며 큰 소리로 건성건성 약속 아닌 약속을 했다. 어머니는 생긋생긋 웃고 있는 철없는 나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내 방을 나서던 어머니의 쓸쓸한 뒷모습이 삼십 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살면서 두고두고 그날의 서툰 약속을 가슴 시리도록 곱씹었다.

결혼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휴일마다 농사 일손을 도우라고 채근 하시는 시어머니의 성화가 심했다. 농사일을 전혀 모르는 나는 매주 시댁에 갈 때마다 ‘나는 누구?’ ‘여기는 어디?’ 하며 혼란스러워했다. 모든 것이 낯선 곳에서 나는 점점 말이 줄어들고 장난기가 사라졌다. 남편 직장이 쉬는 휴일이 다가오면 마음속으로 때 아닌 기우제를 드리기도 했다. 비가 오면 시골에 가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큰딸 해인이가 태어났다. 난 좌충우돌의 큰며느리에서 엄마라는 어설픈 이름까지 더하게 되었다. 세월은 정신없이 흘렀다. 치매로 요양원에서 생활하던 친정어머니는 몇 년 후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소천하셨다.

사람들은 살면서 수많은 약속을 한다. 산산이 부서질 헛된 약속이 있다. 목숨처럼 지키고 싶은 소중한 약속도 있다. 나처럼 엉겁결에 했던 서툰 약속도 있다. 약속은 사람이 하지만 때로는 그 약속이 사람을 끌고 간다. 나에게도 숱한 삶의 고비가 있었다. 내가 건성으로 했던 그 서툰 약속이 나를 끌고 여기까지 왔다. 시부모님을 이해해 보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시댁 형제들 앞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입을 더 굳게 다물었다. 음식 솜씨는 여전히 별로지만 부엌의 식탁은 어느덧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내 책상이 되었다. 국졸이 최종 학력이던 어머니와의 서툰 약속이 나를 오늘까지 살게 한 원동력이 된 셈이다.

내 인생에서 제일 큰 변곡점은 결혼이었다. 딸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심정을 깊게 깨닫게 된 것은 딸 해인이의 결혼을 앞두고서다. 나는 친정어머니에게 했던 서툰 약속을 유산처럼 딸에게 전해 주었다. 내가 살던 20세기가 아닌 21세기를 살아가는 딸에게는 까마득한 전설 같은 이야기다. 역시 딸도 나처럼 건성으로 약속을 했다. 녹록지 못한 것이 결혼이다. 하지만 내 딸도 삶의 고비가 닥칠 때마다 우리의 전설 같은 약속을 되새겼으면 한다. 문득 보청기 없이는 듣지 못하던 친정어머니의 귀에 가만히 속삭이고 싶어진다.


“엄마! 잘 있지?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며 산다는 것이 무척 힘들었어. 그때는 비록 건성으로 했지만 그 약속 지키려고 노력했어. 하늘나라에서 우리 다시 만나면 엄마가 늘 해 주었듯이 ‘이 세상에서 젤로 이쁜 우리 딸 참 잘했구나.’ 하는 엄마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열심히 살았어. 엄마 사랑해.” 세월에 굽어 가는 어깨가 산처럼 묵직해진다.

작가의 이전글빨간 종이와 하얀 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