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바보

by 김은하

“박경순님 보호자분.”

친절을 애쓰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나를 찾는다. 몸이 불편한 시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다니다 보니 언제부턴가 보호자라는 감투 아닌 감투를 쓰게 되었다.

결혼하고 삼십여 년이란 세월은 참으로 많은 걸 변하게 했다. 호랑이같이 무섭기만 했던 시어머니는 어느덧 내 품안에서 종이호랑이가 되어있다.

시어머니의 성격은 친정어머니와는 정반대의 성품이었다. 세상에서 어머니라는 단어의 뜻이 전혀 다른 의미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던 남편의 어머니…….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첫아들인 르우벤은 ‘보라 아들이다.’ 라는 뜻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친동생 라헬과의 경쟁에서 남편의 마음을 얻지 못한 언니 레아가 첫아들을 낳고 내가 아들을 낳았다고 흘렸을 눈물이 어렴풋이나마 이해된다.

나 또한 아들을 낳고 남편에게 했던 첫마디가

“나도 아들 있다.” 라고 했다.

그땐 믿음이 없던 때라 시어머니와의 불편한 감정 때문에 남편에게 투정처럼 했었던 말이다.

그러나 성경을 접하면서 열 달 동안 태중에 함께 했던 자식의 이름을 르우벤으로 짓기까지 겪어야 했을 레아의 복잡한 심정과 차마 뱉어낼 수 없었을 상한 마음들이 아프게 느껴졌다.

삼녀 삼남 중에서 위로 누나가 세 명이고 장남인 남편에 대한 시어머니의 아들 사랑은 엄청났다. 그걸 바라보아야 하는 나의 마음은 많이 힘들었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시어머니와 경쟁을 할 수도 없었고 못 본 듯 돌아설 수도 없었다.

그렇게 힘들었던 시어머니가 한 사람의 여자 사람으로 보인 사건은 시아버지의 장례식 때였다. 시아버지는 무서운 시어머니의 반대편에서 늘 부족한 나를 살펴주시고 챙겨주셨던 다정다감한 성품이셨다.

작은 체구로 시골에서 온갖 농사일을 하시면서도 커다란 라디오를 자전거 뒤에 싣고 다니며 음악 듣는 걸 좋아하셨다. 하지만 환갑이 넘은 나이에 큰아들을 결혼시키고 이제 막 손녀, 손주 재롱으로 입가에 웃음꽃이 필 무렵 췌장암으로 삼 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으셨다.

그리고 정확히 삼 개월이란 시간을 우리와 함께하고 떠나셨다. 한 달은 서울 구로병원에서, 한 달은 큰아들인 우리 집에서, 나머지 한 달은 요한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지내셨다. 시골집으로 모신지 하루 만에 소천 하셨다.

무척이나 추웠던 겨울의 한복판에서 지금처럼 장례식장이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가족들은 슬픔에 젖을 시간도 없이 문상객에게 대접할 음식 등을 준비해야 했다. 그때 시어머니는 모야모야병을 앓고 계셨고 회복 중이었기에 절대 안정이 필요한 때였다.

난 추위를 많이 타는 데다 힘들고 피곤했다. 따뜻한 이불속을 벗어나기가 마음처럼 쉽지 않아 갈등하고 있었다. 아직 어둠이 먹물처럼 깔려있던 그 차가운 새벽녘, 빠끔히 열린 방문 사이로 분주히 오가는 한 여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건강은 뒤로하고 반 백 년을 함께 자식을 낳으며 살았던 애증의 한 남자를 떠나보내기 위해 마지막을 준비하는 한 여자가 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나를 그렇게 무섭고 힘들게 했던 또 다른 어머니라는 이름의 한 여자가, 태산처럼 꿋꿋이 여섯 자식과 남편의 노름빚까지 온몸으로 감당하며 버텨온 이 비루한 땅의 한 여자 사람이 내 눈으로 들어온 것이다.

“내가 지금 저 상황이라면 어떤 심정일까?”

가만히 나에게 묻고 있었다. 수천수만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시어머니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조금씩 바뀌었다. 같은 여자로서, 아들을 둔 엄마로서 시어머니를 좀 더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세월은 다시 덧없이 흘렀다. 지금 난 아기처럼 연약해진 시어머니의 보호자로 불리어지고 있다.

“아들 하나도 이렇게 힘든데 어머니는 아들 셋을 어찌 키우셨어요?” 하고 물으면

“내가 뭐 했다냐? 지들이 그냥 컸지.”

하며 누런 틀니를 들어내어 웃고만 계신다. 아직도 아들 이야기만 나오면 좋아서 함박웃음을 짓는 우리 어머니는 여전한 아들 바보다.

사진을 볼 때마다 아빠가 할머니인 줄 알았다는 내 아이들의 농담처럼 아들을 닮아도 너무 닮은 어머니의 주름진 손가락에 오늘은 새빨간 매니큐어를 칠해 드려야겠다.


작가의 이전글서툰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