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갑자기 울어대는 핸드폰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서울 사는 친언니다. 언니와의 통화가 익숙하지 않은 나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잘 지내지. 무슨 일 있어?”
“너희 집은 법원에서 편지 온 거 없냐?”
과자 포장지처럼 부풀린 수식어들을 싫어하는 나와 언니는 곧바로 전화한 본론을 나누었다.
사업하던 형부는 집을 장인 이름으로 샀다. 그런데 보증 서주기가 주특기인 친정아버지는 그 집을 담보로 당신의 사촌에게 은행 대출을 해주었다. 일주일만 쓰고 준다던 그 사촌은 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아버지는 언니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유언처럼 되풀이했다. 형부의 사업도 부도가 나고 결국 그 사연 많은 집을 포기하기로 했다. 형제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유산 포기각서를 썼다. 십 년이 지난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랬던 그 집이 유산 포기 각서의 마무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십여 년 만에 다시 살아난 것이다. 부모 없는 하늘 아래에서 잘 살고 있는 다섯 형제에게 아버지가 직접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내듯이 찾아온 것이다.
아버지의 그 이름뿐이었던 집이 유산이 되어 법적으로 살아나서 우리 앞에 떠억하니 버티고 서있는 것이다.
이 작은 머리로, 가슴으로 이해해보려고 무던히도 애써야 했던 생물학적 나의 아버지.
들숨과 날숨이 고생뿐이던 내 어머니가 우리에게 부르짖으며, 각인시키셨던 ‘느그들 아부지’.
내 가슴 한편을 푸른 멍울처럼 물들여 놓고 치매 요양원으로 홀로 떠나보낸 어머니의 남편.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온 날은 다섯 자식을 모두 깨워서 줄을 세우셨다. 형제들은 눈을 비비고 일어나 술 취한 아버지가 잠들 때까지 열중쉬어와 차렷을 반복해야 했다.
제대 후 아버지는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열심히도 하셨다. 사업 동업하기, 돈 빌려주기, 보증서 주기…….
어린 자식들은 빚 받으러 가는데 수시로 동원되기도 했다.
우리는 돈 받으러 간 남의 집 안방에 줄줄이 앉아 있다가 끼니때가 되면 밥도 얻어먹었다. 그 집에 살던 또래 아이들과 놀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어른이 없는 집에서는 어머니가 그 집 아이들 밥까지 해서 우리와 함께 먹이셨다.
길고도 길었던 아버지의 제대 후, 서툰 사회 적응 기간은 가족들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깊고 아픈 생채기를 남겼다.
다섯 자식은 모두 신문 배달을 하고 공장에서 일하며 공부를 해야 했다.
부모에게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것을 습득한 적이 없는 것 같다. 형제들은 각자의 삶을 스스로 찾아야 했다. 뿔뿔이 흩어져 서로의 몫을 감당해야 했다.
우리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묵언의 약속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도 같다. 어머니와 다섯 자식을 몸서리치게 차가운 세상 속으로 떠밀었던 그 아버지가 다시 우리 앞에 버티고 서계신 것이다.
나는 돌아가신 지 십여 년 만에 빚을 유산처럼 안고 찾아온 아버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온몸을 휘감았다. 아버지에 대해 조금은 정리된 줄 알았던 해묵은 감정들이 다시 수면위로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가슴 깊이 숨겨둔 주홍글씨 같은 감정들이 어지럽게 늘어서며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아버지를 많이도 미워했다. 평생 가족을 고생시킨 비겁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어머니의 모습은 우리와 너무나도 달랐다. 외갓집의 큰딸이던 어머니는 여덟 살 때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빈자리를 누구보다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땅이 꺼지는 외할머니의 한숨 소리를 기억하는 어머니는 우리에게
“자식 곁에서 숨만 쉬고 있어도 아버지께 감사해야 한다.” 하며 말씀을 아끼셨다.
어쩌다 아버지를 향해 쏟아내려던 우리들의 원망은 꺼내 보지도 못하게 입단속을 시키셨다. 쏟아내지 못하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차곡차곡 가슴속에 쌓여 결국 건너지 못할 강을 이루었다.
‘유산 포기각서를 쓴 나는 아버지께 받은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었을까?’
어렴풋한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기억해본다. 책상 위에서 글을 쓰는 내 모습에서 초라한 앉은뱅이책상에서 글을 쓰던 아버지의 굽은 등을 나는 기억한다.
죽을 수도 살아갈 수도 없을 것 같던 벼랑 끝자리에서 길고 긴 오욕의 시간을 견디던 아버지의 초라한 굽은 어깨를 나는 기억한다.
‘정말 나는 아버지께 받은 유산이 이 빚뿐이었을까?’
아버지!
아버지를 잊고 잘 살아가는 자식들이 보고 싶어 빚을 한 보따리씩 품고 오셨어요. 여전한 아버지의 방법이시네요. 그런데 아주 잘하셨어요. 다섯 자식이 오랜만에 아버지가 주신 빚 보따리 앞에 똘똘 뭉쳤답니다.
“부모 없는 세상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한다.”라고 말해 주고 싶어 요란스러운 빚 보따리 앞세워 나들이하신 건가요?
아버지!
숨이 턱턱 막혀오는 부모라는 이름 앞에 많이 힘드셨지요. 따뜻한 말 한마디 다정히 해드리지 못한 죄송함이 가슴에 사무치네요. 부모라는 자리에 서보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겁니다.
저도 아버지를 많이 닮았나 봐요. 아버지만큼이나 이 자리가 서툴기만 합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이 서툴고 어려운 자리를 묵묵히 저희 곁에서 지켜 주시어 감사합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남들에게는 발길에 차이는 돌멩이만큼이나 흔한 이 한마디가 제게는 너무도 어려운 문장이었나 봅니다. 때 늦은 제 고백을 듣고 계신가요.
“가슴이 무너져 내릴 때마다 아버지가 그리워지는 걸 어찌합니까?”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에 대고 아버지가 들을 수 있게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목이 메어와 한마디도 할 수가 없다. 캄캄한 어두움만 비스듬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