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번개팅 한 번 할까?”라는 친구의 제안에 흩어져 사는 삼총사의 얼굴에 오랜만에 화색이 돌았다. 긴 코로나는 그동안 잘 뭉쳐 다니던 우리 삼총사를 집에만 갇혀 지내며 창문 있는 감옥살이에 지쳐가게했다. 그나마 카톡의 단체 방에서 수다로 묵은 분풀이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너나 할 것 없이 답답해하던 중에 친구의 번개팅 제안은 가뭄 속에 단비같이 솔깃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워낙 수상한 시절이라 우리가 만나는 것도 나름의 명분이 필요했다. 우치공원에서 걷기 운동을 한다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떨어져가는 중년의 체력을 보충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점심은 김밥 몇 줄을 사고 과일은 각자 냉장고를 털어 오기로 했다. 세 명의 주부들이 공식적인 가출 데이를 모의했다. 거사는 미루는 것이 아니라며 친구는 다음 날로 번개팅 날을 잡았다. 일곡 사는 친구 집 근방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늘 하루 여행갑니다. 나를 찾지 마세요.”
다음 날 아침 식탁에서 우리 집 두 남자에게 나는 하루 동안의 주부 파업 신고를 했다. 집 떠나가는 옷자락이라도 좀 잡아 주면 좋으련만 똘망똘망한 남자들의 두 눈은 별로 아쉬워하지도 않는 표정들이다. 두 남자도 오랜만에 로또같은 휴가를 즐기는 기분인 것 같다. 거리 두기. 좋은 말이다. 오늘 우리 가족도 거리 두기가 필요한 것 같다.
일곡으로 가려면 26번 버스를 타야 한다.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몇 정거장을 걸어서 26번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동행하기로 한 친구도 벌써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오 분 정도 기다리니 시내버스가 왔다. 버스 안에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고속버스 터미널을 지나고 곧 빈자리가 생겼다. 친구와 나는 서로 떨어져 앉았다. 예전 같으면 옆자리에 앉아서 긴 수다를 떨었으련만 우리는 최대한 거리를 두고 말을 아꼈다.
나는 맨 뒷자리에 깊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버스 안은 빈자리가 반이었고 사람도 반이었다. 눈치껏 듬성듬성하게 자리 잡은 승객들은 조용했고 버스 안은 깨끗했다. 오랜만에 바라보는 창밖 풍경은 마음을 들뜨게 했다. 승용차를 타는 기분과는 사뭇 달랐다. 버스를 처음 타본 사람처럼 모든 것이 신기했다. 친구들과 소풍가는 유치원생이라도 된 기분이라고나 할까
갑자기 어디선가 “에고에고”하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창밖을 바라보던 나는 눈을 돌려 버스 안을 둘러보았다. 남루해 보이는 옷차림새의 할머니가 버스 계단을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할머니는 바로 앞 빈자리에 앉았다. 좁은 버스 안에서 몇 걸음 옮기는 것도 불편해 보였다. 할머니는 움직일 때마다 계속 “에고에고”라는 소리를 반복했다. 할머니의 신음소리가 곡소리처럼 내 귓전을 맴돌았다. 나는 몸이 많이 불편해 보이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후 어디선가 요란스럽게 울리는 핸드폰 벨 소리에 버스 안이 다시 들썩였다. 승객들의 사나운 시선은 소리가 나는 앞자리 쪽으로 쏠렸다. 또 에고에고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여기저기 호주머니를 더듬더니 천천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여보세요. 엉 나여. 나 지금 아들 보러 가는 길이여. 감옥에 있는 우리 아들 면회 가는 길이여….”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 오래된 듯 혼자만의 대화가 익숙해 보인다. 귀까지 어두워진 할머니의 커다란 목소리는 조용한 버스 안을 가득 울리며 허공에 너울이 진다.
농사 중에 제일 힘든 농사가 자식 농사라고 한다. 할머니의 아들이 무슨 사연으로 감옥에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고단해 보이는 할머니의 삶 또한 나는 감히 짐작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움직이는 것이 고통의 신음소리뿐인 늙은 어머니는 노쇠한 몸을 이끌고 오늘도 감옥에 갇혀 있는 아들을 보러 가는 길인가보다. 할머니는 노랫말처럼 들리는 곡소리를 붙들고서 아슬아슬한 생의 끈을 버티고 있어 보였다. 오직 아들을 보는 것이 생의 마지막 이유인 것처럼.
부모와 자식은 무슨 인연이었을까 반 토막 된 이 땅의 소원은 통일이라지만 우리 어미들의 소원은 결코 통일만은 아니다. 자식 얼굴 한 번 더 눈에 넣는 것이 소원이라는 어느 늙은 어머니의 애달픈 소망은 오늘도 겨운 세파에 삭은 육신을 움직이는 힘이 되었다.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천륜이다. 부디 서로의 인연이 귀한 만남이었기를 소망한다. 차창 밖으로 무심하게 흩어지는 풍경들이 아프게 다가왔다가 또 멀어져간다. 인생의 신기루처럼.
부모는 뭐고 자식은 뭔지 인생의 풀기 힘든 수수께끼를 품어 안고 26번 버스는 달리고 있다. 허락하신 귀한 시간을 감사하지 못하고 하루의 일탈을 꿈꾸던 철없는 나를 품어 안고 26번 버스는 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