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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하 Sep 05. 2022

토요일 아침, 비가 내린다

  토요일 아침이다. 주 오 일 근무가 시행된 지도 몇 해가 지났다. 토요일은 만성 피로에 시달리던 직장인과 헉헉거리며 교문 앞을 달음질하던 학생도 늘어진 늦잠으로 꿀맛 같은 시간을 보낸다. 경주마처럼 일에 치여 분주하게 살아온 오 일간의 시간을 보내고 맞이하는 휴식의 첫날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보상 같은 순간들이다.

  느슨해진 시계태엽처럼 조용하다 못해 고요하기까지 한 토요일 아침 비가 내린다. 늘어진 아침잠에 빗소리까지 간간히 들린다면 이보다 더 환상적인 조합이 있을까? 이불속에서 듣는 빗소리만큼 행복한 것도 없다. 나는 비가 오면 슬레이트 지붕 위를 하염없이 두드리던 어느 옛날의 기분 좋은 기억이 소환되어 꿈결처럼 잠이 든다. 

  하지만 오늘은 이 고요한 토요일 아침을 마음껏 누릴 수가 없다. 시어머니 생신 준비로 작은집에 가야 한다. 마음은 벌떡 일어나 외출 준비를 서둘러야 하는데 연약한 육신은 이불 속의 평안에서 좀처럼 벗어나고 싶지가 않다. 참 싫다. 이런 기분…. 나이가 곧 환갑인데 난 아직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 것 같아 우울해지기까지 한다. 언제쯤이나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나는 몸뚱이만 한 집을 등에 지고 가는 달팽이처럼 천천히 이불 속을 빠져나왔다. 밤새 퉁퉁 부은 얼굴에 화장품을 몇 번 찍어 발라 소심한 변장을 하고 머리도 대충 만진다. 식탁 위에 남편의 식사 준비를 해두고 우산을 챙겨 조용히 집을 나섰다. 비 오는 날은 밖에 나가고 싶지 않은 날이다. 누군가 등 뒤에서 좀 잡아당겨 주면 좋으련만 바랄 것을 바래야지. 이 또한 며느리의 삶인 것을 어찌하오리까? 몸 따로 마음 따로 인 것을.

  집 밖에서 체감되는 온도는 쏟아지는 비 때문인지 어깨를 움츠리게 했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신발은 벌써 축축하다. 하지만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적당한 리듬을 타며 복잡거리는 내 마음을 차분하게 다잡아주기 충분했다. 세상사 좋은 것도 있고 싫은 것도 있는 법이다. ‘좋은 일 절반 싫은 일도 절반 이 정도면 나쁘지 않네.’ 하며 애써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지하철을 타고 작은집 방향으로 가는 버스로 환승하려고 전대 병원 앞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토요일 이른 시간에 비까지 내리는 병원 앞은 한산하다. 친절한 정류장 현황판은 버스 대기 시간이 십 분 정도임을 귀띔해 준다. 기다리는 것이 취미인 내 눈에는 십 분의 시간이 삼십 분만큼이나 여유롭다. 시간이 주는 여유로움이 좋다.

  넉넉해진 마음으로 버스 정류장 주변을 둘러본다. 대학 병원 근처라 평일 같으면 노점도 많고 차와 사람 소리가 뒤엉켜 시끄러운 곳이다. 하지만 내리는 비 때문인지 길거리는 썰렁하다 못해 짙은 적막함 속에 빗소리만 줄기차게 귓가를 울려댄다. 길거리 신호등 불빛은 가끔 지나가는 색색의 우산들에 나름의 질서를 강조하려는 듯 깜빡거리며 제 할 짓을 다 하고 있다. 

  문득 병원 건너편 병무청 앞에 두 눈이 머물렀다. 병무청 건물 앞에 노점 아주머니가 내 눈에 들어온다. 무채색의 빗속에 색색이 늘어선 야채들의 색이 곱다. 비 오는 좌판에 갖가지 야채를 종류대로 진열해 두고 정작 주인아주머니는 고개를 연신 꾸벅이며 졸고 있다. 지난 저녁잠이 부족했을까? 어쩌면 나처럼 빗소리를 들으며 자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빗소리는 자장가 되어 노점 아주머니의 고단함을 새록새록 재우고 있었다. 

  궂은날 이른 새벽부터 서둘렀을 그녀의 바쁜 일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커다란 우산을 펼쳐 들고 자신의 분신 같은 채소들을 소담스럽게 정리했을 그녀의 거친 손끝이 애처롭다. 따뜻한 아랫목을 뒤로하고 비 오는 거리로 나서야 했을 현실에 우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잠깐의 단잠이 피곤한 육신에 빗물처럼 스며들어 꿀처럼 달디 달았으면 좋겠다. 새하얗게 내려앉은 세월의 흔적들 속에 가장 좋은 기억을 추억하는 단잠이 되어 지길 소망해본다.

  토요일 아침 비가 내린다. 어느 집안 며느리는 시어머니 생신 상을 차리러 마음에도 없는 효도에 떠밀려가고 어느 노점 아주머니의 허연 머리는 세상을 향해 꾸벅꾸벅 속 빈 인사를 한다. 

 대한민국의 삼팔선은 군인이 지키고 파프리카, 오이, 양파, 상추, 당근, 애호박, 시금치, 대파는 쏟아지는 빗속에도 주인을 지키고 노점 아주머니는 졸면서 병무청 앞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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