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밤

by 김은하


창밖은 온통 새하얀 눈 세상이다. 커피 잔의 온기를 느끼면서 창문가에 서 있다. 새하얀 눈은 여름날의 푸르름을 뽐내던 헐벗은 나뭇가지 위에도, 이웃집 노부부의 초라한 지붕 위에도 소리 없이 내려앉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그다지 공평하지 않았음이 부끄러운 듯 애써 새하얀 색깔로 덮어가고 있다. 오래된 그 날도 오늘처럼 눈이 왔었다.

어머니의 근심이 깊어가는 속도보다 빠르고 급하게 가난의 실체는 크고 선명하게 우리 눈앞에 다가왔다. 어린 우리의 피부로도 무언가 달라지고 있음이 체감되고 있었다. 어느 날은 텔레비전이 사라지고 며칠 후에는 전축이 사라지더니 어머니가 사용하시던 까만색 발미싱도 사라졌다.

이른 아침, 낯선 사람들이 집안으로 거칠게 들어왔다. 이사를 가는 것도 아니었다. 낯선 사람들은 우리의 책이며 옷 그리고 엄마의 화장대와 빨간색 자개장롱까지 함부로 마당으로 내놓았다. 우리들은 두려웠다. 하지만 누구도 소리 내어 울지는 않았다. 낯선 사람들에게 며칠만 더 기다려 달라고 사정을 하는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날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집에 안 계셨다.

얼마 후, 예쁜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를 데리고 젊은 부부가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의 세간살이를 내놓던 사람들은 다시 우리 집 안으로 그들의 짐을 옮겼다. 몹시도 추운 날이었다. 겨울의 짧은 해는 하루 일과를 씩씩하게 끝내고 서둘러 떠나는 낯선 사람들과 함께 말없이 떠났다. 어둑해진 마당 한구석에는 갈 곳 잃은 세간살이와 할 말 잃은 우리들의 키 작은 다섯 그림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고만고만했던 우리 형제들은 우리들의 것이 더 이상 우리들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소유의 변동성에 대해서 각자가 느낄 수 있는 수준만큼씩 체감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떨고 있던 우리 형제들의 형편이 딱해서인지, 하염없이 흐르던 어머니의 눈물 때문이었는지 이 집의 새로운 젊은 주인은 어머니가 세를 주었던 문간방에 우리를 잠시 머물 수 있게 해주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피해 어머니는 서둘러 우리 형제들을 문간방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마당에 쌓인 짐들 속에서 어머니가 시집올 때 해 오셨다는 두꺼운 목화솜 이불을 들고 오셨다. 발 딛기도 차가운 냉방에 이불을 깔아 주셨다. 하지만 차가운 겨울밤, 불씨 없는 냉방의 그 몸서리쳐지던 한기는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그리고 눈이 왔다. 평소의 우리들은 눈이 오면 소리를 지르며 패를 나누어 화단가에서 눈싸움을 했었다. 하지만 호들갑을 떨던 우리 형제들은 오늘 조용히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종일 먹지 못해서 떠들 기운도 없었다. 지금 우리 집에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눈치 정도는 있었던 것 같다.

하얀 눈은 마당 위에 함부로 내동댕이쳐진 우리의 초라한 세간살이 위에도, 옆집 은영이네 화단 위에도 공평하게 쌓여만 갔다. 보름달 때문이었을까? 가로등 불빛 때문이었을까? 어머니가 아끼시던 새빨간 자개 장롱위에 새하얀 눈이 한 폭의 그림처럼 겹겹이 쌓여만 가고 있었다. 온통 새하얀 밤이었다.

어머니는 오빠에게 우리를 당부하시고 아버지를 찾으러 다녀오겠다며 새하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고 집을 나가셨다. 그날 밤 늦게 아버지는 여전히 술에 취해 돌아오셨다. 그리고 안방이 아닌 문간방에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그 차가운 이부자리에 몸을 누이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밤새 돌아오지 않으셨다. 그렇게 며칠을 지낸 것 같다. 불씨 없는 냉방에서 몇 끼니를 굶었는지도, 울다 지치고 추위에 지쳐 잠이 든 것이 몇 번인지도 잘 모르겠다.

며칠 후, 어머니가 누런 쌀자루를 머리에 이고 돌아오셨다. 나는 십여 년이 지나고 어머니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왜 그때 돌아왔어. 그냥 도망가지. 왜 이 지질히도 가난한 집으로 다시 돌아왔어!”

그때 어머니는 언젠가 외할머니가 내게 해주셨던 말과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내 새끼들을 두고 어미가 어딜 갈 수 있었겠냐!”

그렇게 어머니는 다섯 자식의 손을 놓치지 않으셨다. 기꺼이 그 고생길을 자식들과 함께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끝까지 놓지 않으려던 그 손을 먼저 놓은 것은 정작 우리 자식들이었다. 치매 진단을 받은 병든 어머니의 주름진 손을 가만히 뿌리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요양원으로 보냈다.

온기 가득한 집에서 따뜻한 커피를 품에 안고서도 나는 창밖의 눈을 보면서 그 하얀 밤의 한기를 느낀다. 빨간색 장롱위에 하얀 눈이 덧입혀지던 그 겨울밤의 가슴 시린 기억들이 바로 엊그제 일처럼 또렷이 눈앞에 그려진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자신을 토닥여 보기도 한다. 애써 부정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삶은 여전히 지치고 버겁다. 어쩌지 못하는 내 삶의 무게들이 아프다.

삶이 우리를 속이는 건지, 내가 삶에 속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눈이 내린다. 눈이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세상은 온통 하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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