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이고요, 혼자입니다.

태생 INFP의 혼자 사는 이야기

by 김프피

부러 돌아가는 먼 길을 택할 때가 있다. 집에 들어가기 싫을 때가 자주 있다. 집이 싫다는 건 아니고, 쌓인 네 개의 벽 안에 혼자 머무르는 게 싫은 거다. 그렇다고 혼자 있는 걸 싫어하지도 않는다. 나는 혼자 보내는 시간이 삶의 필수 요소로 작용하는 사람이기에, 내 시간을 누구와 보낼 것인가 정할 수 있는 기회가 10번 주어진다면 8번은 혼자 있기를 택할 것이다.


먼 길을 돌아간다고 해서 누구와 무얼 하는 것도 아니다. 먼 길을 혼자서 빙 돌아 걷는다. 빙 돌아 걷는 길에는 나 아닌 다른 혼자의 흔적이 있다. '빈차'를 띄워놓고 하릴없는 택시 기사. 종점을 두어 정거장 앞둔 버스 안 맨 뒷자리 승객,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버스가 멈추면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는. 사고가 잦은 횡단보도를 지키고 서있는 경찰관의 경광봉. 횡단하는 사람이 없는 보도에서 깜빡이는 보행자 신호등의 초록불 같은 것. 아, 요새는 9시만 되어도 CLOSED를 걸고 매장을 느긋하게 오가는 빗자루 하나를 볼 수도 있다.


하나와 혼자. 같다 하면 틀림없이 똑같고 다르다 하면 극과 극이 되어버리는 두 단어.


병원을 가는 길은 느린 걸음으로 오래가기를 택한다. 근무를 하다가 잠시 짬을 내서 움직이는 것임에도 겁 없이 여유를 부린다. 사무실에서부터 병원까지 오르막길을 지나면 빠르게 오갈 수 있지만, 오르막길은 아무래도 힘들다는 합리화를 하며 공원 산책로를 택한다. 병원에서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도 똑같다. 오르막길을 넘으면 숨이 찰 테고, 숨이 찬 상태로 사무실에 들어서면 모두의 시선을 받지 않을까 하는, 역시나 자기 합리화를 통한 선택이다.

치료도 시술도 아니고 상담이다. 의사 선생님과 마주 앉아 병원에 오지 않았던 3주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화를 나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적절한 예의를 갖추면서 진료실 안 디퓨저의 리드 스틱이 뿜어내는 향기까지도 친절해진 것만 같은 분위기를 만든다. 그 안에서 오가는 나아진 나의 상태에 관한 이야기와 그런 나의 상태를 적극적으로 반기는 이야기. 평화롭다. 채도가 낮은 색을 즐겨 쓰는 화가가 그린 이른 오후 풍경과 같다.

그럼에도 나는 그곳에 가기 위해 먼 길을 돌아가고, 그곳에서 나와 또 먼 길을 돌아간다. 혼자였던 내가 하나의 환자가 될 수 있도록 준비하고, 반대로 하나의 환자였던 내가 다시 혼자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혼자는 도움닫기다. 오롯한 하나가 되기 위해 넘어야 할 뜀틀 앞에 놓인 발판이다. 혼자인 나는 혼자일 수밖에 없거나 혼자이고 싶은 이유들이 똘똘 뭉쳐진 것처럼 새우잠의 자세라면, 하나인 나는 내가 나여야만 하는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두 다리를 골반만큼 벌리고 곧게 선 자세다. 한숨과 심호흡의 간극만큼 다르다. 혼자 산다는 건, 혼자를 하나로 넓혀가는 일이다. 내가 생활한 공간들을 어지럽히고 쓸고 닦고 채우고 비우고 움직이는 동선만큼 내가 나로서 넓어진다.


혼자 살기 N개월 차. 인생 절반을 "어차피 혼자 사는 세상"이라는 가치관으로 살아왔으나, 정말 혼자가 되어 혼자를 책임지며 살아가는 일은 이제 막 낯선 기운을 떨쳐냈을 뿐이다. 적절히 적적하고 지극히 지긋한 기분을 만끽하며 나와 친해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