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김치를 담그는 일, 안부를 묻는 일
태생 INFP의 혼자 사는 이야기
집 김장의 히든 멤버가 된 건 그리 오래지 않았다. 너희 아빠를 닮아 게으른 손이라며 못 미더워했던 김장의 리더, 이모는 이것저것 옮기고 양념을 조금 첨가하고 뒷정리를 하는 거면 충분하다 했다. 재작년쯤인가. 팔이며 허리며 남아나는 데가 없다는 이모의 말뿐 아닌 앓는 소리를 듣고부터 나도 고무장갑을 끼게 됐다. 서른을 목전에 두고 있어도 집 안의 막내이고 늦둥이인 내가, 1년 중 명절보다 더 중요한 행사에 뛰게 된 것이다.
이것도 INFP의 특징인데, 잘하거나 빠릿빠릿하진 못해도 하나를 붙들면 제 나름 완벽하게 해내려 한다는 것이다. 절여진 배춧잎 사이마다 속 양념을 비는 곳 없이 꼼꼼히 바르는 내 느린 손짓을 보고 이모와 언니는 꽤나 감명을 받았다. 이 나라 가정의 이십 대 중반을 넘긴 딸들은 예상 가능한 대로 "시집가도 되겠네"라는 말도 자주 붙었다.
나와 언니에겐 '이모'라는 단어가 보통의 이모와는 다른 한자를 쓴다. 다를 이와 어머니 모. 우리에게 이모는 또 다른 엄마와 다를 게 없다. 그런 이모가 요즘 부쩍 내게 자주 하는 말.
"이모가 기운이 있어서 김장하고 반찬도 만들 수 있을 때 네가 시집을 가야지. 이모가 그건 보고 가야지 않겠어."
그럼 나는, 그다지 살갑진 않지만 제 내킬 땐 어린애 티를 내는 집안 막내 캐릭터를 살려 대답한다.
"이모 못 가게 평생 시집가지 말아야지."
이모와 사촌오빠 두 식구, 언니네 다섯 명의 식구, 그리고 홀로 살게 된 내 몫의 올해 김치는 총 열댓 포기였다. 배추도 흉 지고 절이는 건 도무지 못하겠다며 큰 마음을 먹은 이모가 칠십 년 인생 처음으로 절인 배추를 사서 한 김장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내 몫의 김치는 언니네 집으로 가는 김치 통에 함께였다. 사실, 겨울의 파주행은 무엇보다 꺼려하는 내가 고민 없이 김장하러 간 건 염치가 한몫한 것이었다. 나 혼자 사는 집, 나 혼자 쓰는 냉장고, 나 혼자 먹을 밥상을 채워줄 김치인데 미적거릴 만큼 못돼먹은 애는 아닌 것이다.
저녁쯤 집에 도착해 가져온 김치 두 통부터 냉장고에 넣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내 집 냉장고엔 달걀 두 알과 반의 반쯤 남은 뽀모도로 파스타 소스, 크림치즈와 버터, 맥주 한 캔과 한 잔이 빈 와인, 탄산수 8개와 필터 정수기 물통, 우유가 전부였다. 이가 나간 타일처럼 부분 부분만 채워져 있던 냉장고, 최신식 양문형인, 전셋집의 기본 옵션. 그 가장 아래 칸 깊은 곳에 새로 입주한 배추김치 네 포기와 섞박지 한 통.
김치라는 음식은 참, 특이하다. 누구는 없으면 밥을 못 먹고 굳이 젓가락을 대지 않아도 밥상엔 있어야 밥맛이 돈다 한다. 나는 그 정돈 아니다. 물론 냉장고에 밥반찬이 하나도 없을 때 가장 먼저 '사야 한다' 생각이 드는 건 김치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또 잘해 먹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치가 없는 냉장고는 조금 낯설다. 냉동실에 냉동 대패 삼겹살이 있고 싱크대 상부장에는 냄비에 부어 5분만 끓이면 바로 먹을 수 있는 비비고 국물 시리즈가 있고 한 끼 용 김이 있어도 말이다. 김치에 죽고 못 사는 식성도 아니면서 김치가 없으면 내 일상이 붕 뜬 느낌이다. 배고프면 꼬박꼬박 끼니를 잘 채우면서도, 김치통 자리가 빈 냉장고와 씻겨진 김치통이 마르고 있는 그릇 정리대를 보면 혼자 산다고 너무 막 지내나 싶다.
생각해보면, 안부 같은 거 아닐까. 김치라는 거. 만나면 밥 먹었냐, 헤어질 때 밥 한 번 먹자 하는 인사처럼 말이다.
김치는, 가족끼리 함께 살 때의 소속감이 따로 살게 되며 비워진 만큼을 채워주는 안부인 것이다. 그 집에서 만든 김치가 그 집의 김치통에 담겨 이 집에 온다면, 그 집은 이 집에게 "바빠도 밥 챙겨 먹기"를 요구하는 것. 이 집의 김치가 떨어졌을 때를 귀신같이 알고 전화하는 건, 그 집에게 이 집의 안부는 늘 고려의 대상이라는 것.
갓 담은 겉절이도 한 봉지 준다는 걸 말렸다. 집에서 먹어봐야 저녁 한 끼, 그마저도 저녁 운동을 하는 월요일과 수요일에는 건너뛰기 마련이다. 안 받아간다 하여 이모가 서운한 건 아닐까 싶지만, 이모는 그러라 하며 덧붙인다.
"너는 집에 김치 냉장고도 없으니까, 떨어지면 그때 와서 덜어 가."
사람이 잘만 살다가, 끈이 풀리듯 힘이 빠지면 가장 먼저 흔들리는 게 끼니다. 그렇게 끼니가 흔들릴 때면 집으로 찾아올 거라는 마음. 끼니가 흔들릴 때면 찾아갈 수 있는 집이 있다는 마음. 그 마음의 크기나 색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걸, 조금 쌩뚱 맞지만 김장하다 버린 옷을 빨아 널다가 깨달았다.
어쩌면 혼자 사는 일은 언제든 함께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수월해지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