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생 INFP의 혼자 사는 이야기
하지만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게 우울의 증상만은 아닐 것이다. 우울한 모두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닌 것처럼. 어떤 극에 달하면 그 반대에 대한 생각도 떠오르기 마련이다. 아주 차가운 것을 만지면 뜨겁게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잘 살아가는 것을 목격하거나 잘 살아감을 경험할 때 그 종말의 실루엣 또한 겹친다. 살아감은 생과 친해지는 일인 동시에 죽음과 안면을 트고 통성명을 하고 또 마주치면 아는 체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울을 병적 증상으로 겪고 있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 죽음에는 더 성숙하고 시니컬하다. 가라앉은 마음을 얹은 두 무릎을 끌어안고 바라보니 우울은 죽음과 그다지 닮지 않았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선생님(태생 INFP 시리즈에서 이 호칭은 90%의 비율로,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정신과 담당의를 말한다)에게조차 운도 떼지 못한 이야기가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0.5mg까지 줄인 항우울제가 리셋될까 봐 두려워서가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다.
내가 죽음을 생각하는 일은 죽고 싶은 충동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달리 설명할 것 없이 '생각'일뿐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그리스인 조르바와 화자가 벽난로 앞에 배를 깔고 엎드려하는 생각처럼 말이다. 또, 내가 죽음을 생각하는 일을 우울증의 증상이라고 볼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생각의 전재는 항상 죽은 후에도 의식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 나의 장례식장에서는 일회용품이 사용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럼 사람들이 오래 머무르며 슬퍼하지 않고 금방 자리를 뜰까?
- 나를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나에 대한 기억은 얼마나 지속될까?
- 죽음 이후, 죽음으로 인해 경험하지 못한 세상의 모습을 보면 나는 후회할까?
옷이나 집을 고르는 것과 비슷하다. 이 색깔이 나에게 어울릴까, 이 옷을 입으면 사람들은 나를 먼저 볼까, 옷을 먼저 볼까. 또는 이 집이 지금의 집보다 조용하고 평온해서 집으로의 역할을 잘 해낼까.
이 집에서 나는 잘 잘 수 있을까.
하루를 재활용하는 일.
날이 어두워지면 하루만큼 지저분해진 것을 닦고 말려둔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쓴다. 그리고 또 닦고 말린다. 또 하루만큼 쓴다.
일회용이기엔 아까워서 쓰고 또 쓰다 보니 어느새 하나의 생만큼 되는 것이다. 매일은 그런 것이다.
너무 낡거나 해져서 더 이상 조금의 시간도 담을 수 없게 되면 그 하루의 활용은 끝이 난다. 그러니까 죽음은, 시간을 담으면 줄줄 새고 마는 순간이나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것이다.
나는 화분이다. 이런 생각으로 살다 보면 하루하루가 보기 좋게 예쁘다. 아무것도 안 피면 뭐가 필까 하는 기대로 종일을 보낼 수 있다. 다만, 약을 빼먹지 않고 부지런히 챙겨 먹어 내가 나에게 착해졌을 때만 할 수 있는 생각이다.
하나는 반드시 그 반대와 함께 온다. 사뿐함은 침울함과 멀지 않다. 내일을 더 팔랑팔랑 하게 보낼 생각을 하는 동시에 자각한다. 나는 아직 항우울제 복용 중인 환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