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ㅇ난감> <잠> <댓글부대>
한가한 일요일, 쇼츠를 열심히 넘기고 있었다.
공무원 한국사를 가르치는 전한길 선생님이 나왔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냐. 배신하는 존재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본 여러 작품 중에 엮이는 세 작품이 있다.
<살인자ㅇ난감>, <잠>, <댓글부대>
좋아하는 배우들이 나와서 본 작품들인데 다 보고 나니 보여주는 바에서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경계의 모호성
<살인자ㅇ난감>은 캐릭터 각자마다의 '정의'로움이 있다.
우연히 중대범죄자만 죽이게 되는 이탕은 자신이 죽이게 되는 사람들이 범죄자임을 알고 다행이라 여긴다. 송촌은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가차 없이 죽인다. 형사 장난감은 송촌때문에 사경을 헤매는 아버지를 두고 있지만, 개인이 어떻게 죽일 사람과 죽이면 안 되는 사람을 구분하냐는 신념을 품고 있다. 하지만 그도 마지막엔 끝내 사람을 죽이고 만다. 그리고 장난감과 송촌 사이의 이야기, 즉 형사였던 장난감의 아버지가 과거 송촌을 무시하고 막 대했던 이중적인 장면은 또 한 번 모두의 가치관을 흔든다. 스토리가 진행되는 내내 각자의 정의를 추구하지만 마지막엔 그 누구에게도 정의가 남아있지 않다. 서로를 나쁜 놈이라 여기며 달려들지만 과연 누가 나쁜 놈인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잠>에서는 누가 제정신인가를 논한다.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몽유병 진단을 받은 현수는 정말 귀신이 씐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기이한 행각을 벌인다. 생달걀, 생고기, 날 것 그대로의 생선을 먹어치우고, 창밖으로 몸을 던지고, 냉동실에 수진과 함께 키우던 강아지를 넣어 죽여버린다. 이때 수진의 엄마는 부적 하나를 보여준다. 하지만 수진은 언제나 그렇듯 현수와 수진 둘이 함께라면 못 이겨낼 것이 없다고 믿는다. 둘의 아기가 태어난 뒤로는 현수를 향한 수진의 공포가 한계치를 넘어선다. 현수는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증세가 호전돼 집으로 돌아오지만 수진은 이미 무당의 말을 병적으로 믿고 있다. 현수가 귀신에 씌었다고 굳게 믿고 온 집안을 부적으로 도배해 둔 장면에서는 소름이 끼친다. 수진은 현수(몸에 깃든 귀신)를 향해 어서 나가라고 소리친다. 연극배우인 현수는 연기인지 실제인지 모를, 귀신이 자신의 몸에서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엔 현수가 미친놈이었다가 이후엔 수진이 미친년이었다가, 마지막엔 사실 모두가 그 경계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의문이 든다.
<댓글부대>에서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없다.
영화는 만전이라는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기술을 가로채기 했다는 의혹을 취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기자인 임상진이 중소기업 사장을 만나 기사를 쓰지만 사장의 말이 거짓이라는 증거 때문에 신문사에서 쫓겨난다. 이후 댓글부대의 멤버 중 한 명인 이영준을 만나 그들이 했던 인터넷 커뮤니티 상의 작은 여론 조작부터 만전기업의 거대한 여론 조작에 대한 이야기까지 모두 듣게 된다. 신문사에 복직해 관련 기사를 대서특필하지만 그 이야기는 본명인지 가명인지도 모를 이영준이 모두 기자를 속이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로 드러난다. 하지만 기자 임상진은 믿을 수 없어 혼자서 취재를 2년간 더 이어간다. 그리고 그는 그의 취재 이야기를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린다. 영화 말미에 임상진의 이런 내레이션이 깔린다. "완전한 진실보다 거짓이 섞인 진실이 더 진짜 같다. 완전한 거짓은 진실이 없지만 거짓에 진실을 섞었다는 말은 진실에 거짓을 섞었다는 말이고 완전한 거짓이 아니라는 진실이라는 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정보는 거짓과 진실이 섞여있고 무엇을 믿느냐는 개개인의 선택이지만 무엇도 온전히 믿을 수 없겠다는 의문을 품게 된다.
대비되는 개념 사이의 경계가 명확하다고 믿었지만 그 경계를 누가 정하느냐를 생각해 보면 모호할 수밖에 없다. 역사에 박학한 것은 아니나 인간은 오랫동안 인간이 만든 경계를 전복시켜 왔다고 생각한다. 신분제 시대에서 평등의 시대로, 일부다처제에서 일부일처제로, 왕조의 시대에서 민주주의로. 이건 다른 말로 인간은 배신하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부정적인 의미로 말하는 배신보다는 스스로 만든 신념에 대한 변화를 말하는 배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진실이고 거짓인지, 정의고 비정의인지 그 경계가 흐릿한 곳에서 배신은 나의 내면에서 가장 많이 일어난다. 나의 믿음을 바탕으로 한 가치관과 신념, 혹은 사소한 생각들. 크고 작은 내 머릿속 믿음들은 어느 때가 오면 바뀐다. 이럴 때 우리는 배신한다고 하지 않고, '바뀌었다'든가, '그 생각이 사라졌다'든가, '변했다'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것 또한 일종의 자기 배신이지 않나. 나의 믿음을 내가 스스로 저버리는 것. 잘못됐고 잘했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끝없이 내 믿음을 저버리고 새로운 믿음을 만들어낸다. 내가 어떤 일을 겪어서, 혹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등의 이유로 말이다. 나는 그동안 너무 생각 없이 나를 믿는다고 말했던 것 같다. 신을 안 믿고 스스로를 믿는다고 했는데 차라리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결론을 생각하고 쓴 글은 아니고, 오늘 <댓글부대>를 보고 나야말로 나를 가장 많이 배신하는 존재인데 누구를 믿고, 누구에게 믿음 받기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이 스쳐 생각나는 대로 써 내려간 글이다.
그래서 여담으로 두 줄 더 덧붙이자면,
결혼적령기인 나이라 그런지 결혼을 꼭 하고 말겠다는 큰 뜻은 없지만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의문도 생긴다. 배신하는 존재간의 배신하지 말 것을 약속하는 계약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