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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맏딸 Dec 17. 2021

종용's answer. 일곱 장의 보물 종이

아빠 인터뷰 1차__Q. 가장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나는 가볍고 산뜻한 질문으로 포문을 열고 싶었다. 무엇이 행복했느냐고 물으면, 종용과 영숙이 행복한 생각을 뒤적이다가 자신도 모르게 행복해질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생각이란 건 파일 탐색기에서 데이터 찾듯이 찾아지는 게 아니었다. 행복을 찾으려면 자연스레 행복하지 않은 것들을 떠올리고 제치는 과정이 필요했다.


 




Q. 아빠, 아빠의 가장 행복했던 어린 시절 기억을 적어주세요.





A. 내가 태어난 때는 1958년 11월 13일(음력) 유시이다. 난 김재경 씨와 정복님 여사의 사이에서 큰아들로 태어났다. 아들이 귀한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난 것이다. 난 전혀 모르는 세월이지만, 귀한 자식 얻었다고 많이들 행복해했다고 한다. 

     

내가 어린이 시절에는 우리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 김윤옥 씨다. 나 '김종용이'를 얼마나 귀엽다고 해주셨는지 마을 사람들이 다 안다. 할아버지는 내 머리카락을 계속해서 쓸어 올려서 내 머리카락이 늘 위쪽을 향해 있었단다. 그 모습을 보고 아주 웃고들 난리도 아니었다고 한다.     



나에게는 누님이 두 분 계신다. 한 분은 내 진짜 누님이시고, 또 한 분은 내 막내 고모님의 따님이시다. 그중 막내 고모님의 따님은 유복자다. 6.25사변 때에 고모부님이 경찰이셨는데, 빨갱이들한테 끌려가셔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래서 막내 고모님은 우리 집에서 사셨고, 나를 계속 업고 다녔다고 한다. 아마, 그때가 제일 행복할 때였을 것 같다. 그런데, 생각이 잘 안 나서 모르는 일 같다.


내가 할아버지한테 쓰르메(마른오징어)를 받아먹은 일도 있다. 반 마리 정도 받아서 윗방에서 나오면, 앞에서 말한 누님 두 분이 기다리고 계셨다가 빼앗아서 도망가곤 하셨다고 한다. 나는 전혀 생각이 안 나지만 말이다. 4살 때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동생 익용이가 태어났다. 그래도 우리 막내 고모님은 오로지 나만을 업고 다니셨다고 한다.     



초등학교 입학은 7살 때에 했다. 건강 문제였는지 아니면 사람을 무서워해서였는지, 내가 자주 경기를 하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가 원기소라는 영양제를 사다 줘서 그걸 묵고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도 두 누님이 빼앗아 묵고 훔쳐 묵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는 아버지를 1년에 한 번 정도 봤다. 아버지가 어디서 사시는지도 몰랐다. 그저 할머님이 다 해주셨다. 난 아버지가 무서웠다. 집에 오시기만 하면 멍청하다고 때리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막내 고모님 댁으로 도망가고 가까이하기를 두려워했다. 아버지가 두려워서 집에 가기 싫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도 한글을 깨우치지 못해서 날 미워하셨을까? 내 나름대로는 열심히 배워 보려고 했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는 소꼴 베고 소띠기고(소를 몰고 논둑이나 저수지 쪽에 가서 풀을 뜯어 먹게 하는 거) 그랬다. 한번은 소가 하도 순해서 소 등을 타고 놀다가 소 등에서 그만 잠이 들었다. 소는 나를 태운 채 스스로 집으로 들어왔는데, 그걸 본 어머니가 나를 작대기로 때리셨다. 억울해서 항의하니 일하는 소를 타면 등이 쳐져서 일을 못 한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작대기로 맞아서 울곤 했다.      

5학년 때는 익용이가 학교에 가겠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기도 했다. 그때가 익용이 5살 때였다. 익용이는 6살 때 학교에 들어갔는데, 너무 똘똘해서 학교에서 귀염은 다 받았다. 난 그때도 익용이가 내 동생이라는 게 아주 행복했다. 학교에 가기 싫을 때도 많았지만, 아무리 공부를 못해도 학교는 빠지지 않고 다녔다.     

 


초등학교 시절 제일 행복했을 때는 소풍 가서 보물찾기를 했을 적이다. 내가 보물 종이를 7개까지 찾아서 친구들이 하나도 못 찾고 울고 있을 때 손에 쥐어주었다. 친구들도 너무 고맙다고 하고, 우리 할머니도 계속 그 말씀을 하고 다니셔서 너무나 기쁘고 행복했다. 소풍 때 가족이 왔던 것도 좋았다. 초등학교 5학년 가을 소풍을 가기 전에 할머니한테 말했다. 다른 애들은 엄마가 오는데, 난 왜 맨날 할머니냐고. 함께 오시라고 했더니 어머니가 오셨다. 그렇게 딱 한 번 어머니와 함께 소풍을 가본 적이 있다. 그것 또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어머니도 아주 좋아하시고 좋은 하루였다.     




초등학교 당시에는 복숭아 서리, 수박 서리, 참외 서리도 참으로 재미있었다. 하지만 들켜서 어머니가 작대기로 내 등을 후려칠 때는 엄청나게 아프고 세상 살기가 싫었다. 그래도 그때만 모면하면 또 뭔 일을 꾸몄다. 


초등학교 시절에 가을이 되면 꼭 가는 행사가 있었다. 밤 따러 가는 거다. 산밤 말이다. 무송마을을 출발해서 원산 뒷산으로, 용천사 뒷산으로 그리고 불갑산으로 접어들며 계속 밤을 땄다. 그렇게 밤 따는 거지들이 되어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불갑산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헤매다가 암자를 발견했는데 여스님이 우리를 반겨주셨다. 법당에 들어가서 스님이 주신 떡을 먹고 놀다가 누군가 불상을 잘못 건드려서 불상 머리가 뚝 끊어졌던 일이 있다. 재빨리 그대로 올려놓고 법당을 벗어나서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갔다.



나중에 생각하니 너무나 잘못했던 일이다. 지금도 그 일을 말하는 친구들이 있다. 어쨌든, 초등학교 시절 행복했던 기억은 단연코 소풍 가서 보물 찾았던 일이다. 머리는 나쁘고 공부는 꼴찌였지만 꿈 많은 어린 시절이었다.



나는 종용이 떠올리지 못한 기억 속에, '행복'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김윤옥' 할아버지가 주신 쓰르메(오징어)와 '김재경' 아버지가 사다주신 원기소를 빼앗아 묵은 두 누님은 종용의 행복을 종용보다도 더 잘 알지 모른다. 






☎ Behind


아빠, 이거 대하사극 내레이션도 아니고 왜 이렇게 적으신 거예요. "내가 그때 그랬더랬어. 왜냐면 어떤 일이 있었거든."하고 쓰시라고 예시를 드렸는데...

아니, 아무렇게나 쓰면 된다며?

아, 뭐 편하게 쓰시라고 한 말이긴 한데, 말하듯이 써달라고 했잖아요. 이게 '말하듯이'예요?

왜? 이상하냐?

아뇨. 뭐 저는 계속 보다 보니까 정이 드네요.


아빠, 할머니한테 작대기로 맞았던 일도 행복한 추억이에요?

그렇지. 지금 생각하면 되게 행복한 추억이지. 그땐 작대기로 등을 후려쳐서 되게 아팠지만. 그 작대기가 없었다면 내가 지금처럼 됐을까? 고등학교 시절에는 빗자루 몽둥이나 불쏘시개로도 후드러 맞았어.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행복감이 느껴진다 이 말이야. 그때가 내 세상의 행복이었구나.      


익용이가 귀염은 다 받았는데, 아빠는 익용이가 동생이라는 게 왜 행복했다는 거예요?

익용이를 많이 못 봤잖아. 익용이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올라갔기 때문에, 그때까지만 나하고 같이 산 거야. 그래서 애틋했지. 내가 왜 익용이를 좋아했냐하면. 사실 나한테 많이 맞았어. 익용이만 보면 미안한 감도 많아. 그래서 닭을 잡던가 고기를 잡으면 무조건 익용이부터 줬어. 익용이가 서울로 간 후엔 내가 많이 서운하더라고. 그래서 한 4개월을 잠을 못 잤어. 익용이도 그랬다고 하더라고. 형을 못 봐서 죽겄다고.      


보물 종이 7개 찾은 건 도대체 어떻게 기억하시는 거예요?

왜 기억하냐면, 2학년 때부터 보물찾기라 하면은 내가 최고였거든. 4-5개는 항상 찾았고, 최고로 찾은 게 7개였어. 희한하게 내가 떠들어보면 보물이 있더라고. 5학년 때, 보물 못 찾고 울고 있는 애들한테 하나씩 줬어. 그래서 내가 영웅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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