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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맏딸 Jan 03. 2022

종용's answer. 무송마을에 산다

아빠 인터뷰 2차__Q. 아빠의 고향 마을을 소개해 주세요.

  


고향은 뜨뜻한 온도와 달착지근한 맛을 가진 단어다고향은 한겨울 아랫목 같고 꼭꼭 씹은 쌀밥 같다고작 서른 몇 년 산 나에게도 이런데육십 년을 넘게 살아온 종용과 영숙에겐 어떨까요동치는 세월 속에서도 소중히 지켜왔을 그들 고향의 기억에 대해 물었다.     

      






Q. 아빠아빠의 고향 마을, ‘무송은 어떤 곳이었나요?     





Q. 무송마을은 어떤 구조로 생겼나요? 

(무송마을은 어떤 모양이냐는 질문이었으나, 어떻게 생겨났냐는 질문으로 잘못 전달됐다. 나의 실수. 소통은 중요하다.)


A. 무송마을은 나로부터 7대 할아버지인 두 분이 장성군 삼서면에 사시다가 함평군 신광면으로 오셔서 만든 마을입니다. 그때는 무송마을이라는 명칭도 없었다고 하네요. 장성에는 13대부터 8대까지의 조상님들 묘소가 모셔져 있으니, 무송은 7대 두 분이 첫발을 디뎌 이룩해 놓은 마을인 셈이죠. 두 할아버지 중 형님은 우리 옆집 일가를 이루셨고, 동생이 우리 일가를 일궜습니다.     





Q. 무송마을에는 어떤 모양의 집들이 있었나요?

A. 무송마을은 서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전형적인 은둔형 마을인데요. 무송마을의 집들은 전부 다 흙집이었습니다. 흙과 돌을 함께 쌓아서 만든 집이지요. 지붕은 초가집 형태였고 방과 부엌, 작은방이 일자로 연결된 집들이었답니다. 우리 집 외에 2채 정도만 신식 집 형태를 띠고 있었어요.     


 



Q. 무송마을에는 몇 가구, 몇 사람이 살았나요?

A. 20가구 정도 살았으며 광산 김씨 일가가 촌을 이루고 살았답니다. 어르신과 아이들까지 다해서 약 65명 정도가 북적북적 살았죠. 내 또래 아이들도 약 15명 정도 되어서 많이도 놀고 사고도 치고 일도 도와줘 가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무송마을 앞에는 월산마을이 있었는데요. 거기에 두 집이 더 살았는데 좀 못사는 분들이라, ‘작은 무송’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서로 도와가며 사이좋게 살았습니다.  


   



Q. 무송마을은 잘 살았나요, 못 살았나요? 

A. 중간 정도 살았습니다. 먹고 사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모두 소작농이다 보니 풍족하지는 않아서 겨울에도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늘 열심히 살았던 거지요. 그래도 무송마을에 대한 평판은 좋았습니다. 늘 겸손하고 인사도 잘하고 잘 뭉치는 데 다른 마을이 따라올 수가 없었지요.     





Q. 무송마을의 산과 물, 동물과 식물 같은 것들은 어땠나요?

A. 산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물은 풍부했습니다. 샘이 3개 있었는데 중앙샘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어요. 옛날에는 중앙샘의 물이 아주 풍부해서 밖으로 흘러넘쳤습니다. 우리는 흘러내리는 물을 엎드려서 묵었죠. 나머지 두 개의 조그만 샘은 우리 집에 하나, 내 큰고모님 댁에 하나가 있었습니다. 빨래터도 두 군데가 있었는데,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답니다. 동물은 소, 돼지, 닭, 오리, 말을 키워서 자급자족하는 마을이었답니다.     




Q. 무송마을에서 시내로 나가는 길은 어떻게 생겼나요?

A. 마을 앞길은 아주 엉망이었습니다. 구불구불하여 소 구루마나 다니는 길이었지요. 24번 국도도 형편이 다르지 않아서 완전 자갈 도로였습니다. 차가 지나갈 때 먼지가 너무 많이 났기 때문에 우리는 학교 다닐 때 냇가 길을 이용해야만 했지요.      





Q. 무송마을에서 가장 좋아했던 장소는 어디였나요?

A. 마을 뒷산에 서가들(서씨 집안) 묘소가 있었는데, 놀기가 좋아서 아주 좋아했습니다. 지금의 니(김맏딸) 할아버지 묘소 옆 산속에 들어가서 노는 것도 무지하게 좋아했습니다. 동네 아이들 놀이터였지요. 저수지 뚝방에서 소 풀 뜯기며 노는 것도 아주 좋아했답니다.     





Q. 무송마을에 특별한 장소는 없었나요?

A. 어렸을 적에 무서움을 타지 않아서 잘은 모릅니다만, 연화동에서 무송으로 넘어오는 길이 하나 있었습니다. 거기 있는 쪼끄만 다랑논에서 빗자루 귀신이 사람들하고 싸움을 많이 했다는 거예요. 어른들 이야기로는요. 내 할머님이 밭에서 일하고 들어오시면 꼭 배가 아프다고 가스활명수를 찾으셨어요. 그러면 내가 삼십 원을 들고 연화동의 가겟방까지 뛰어가서 가스활명수를 사와야 했습니다. 저녁 8시가 넘어서요. 난 무섭지 않아서 괜찮았습니다만, 으스스하긴 했습니다. 빗자루 생각도 나고요. 어른들은 밤에는 그쪽으로 안 오고 24번 국도로 돌아서 마을로 오시곤 했습니다. 내가 빗자루 귀신하고 싸움하는 길로 오면 어른들이 안 무섭냐고 물어봤지요.     





Q. 무송마을은 어떻게 변했나요?

A. 하나둘씩 자식을 따라, 아니면 부모님들이 서울로 인천으로 이사를 하는 바람에 이렇게 변하게 되었답니다. 대도시 바람으로 무송이라는 마을이 쇠퇴한 거지요.     





Q. 무송마을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A. 난 아직도 무송마을이 편하고 좋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없지마는 내 기억 속에는 좋은 생각만이 자리 잡은 거로 생각됩니다.     





Q. 옛 무송마을을 떠올릴 때 마음은 어떤가요?

A. 오만가지 생각이 다 나고 추억이 산을 넘습니다. 내 고향이 참 좋다는 생각입니다. 편안하고 부모님과 함께 있는 듯하고, 마을의 옛 모습이 생각날 때는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합니다. 나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무송마을이지요.          





무송마을은 조용하다사람은 떠나고 추억만 남아 작은 마을에 맴돈다어느 집은 헐리고 어느 집은 지붕이 무너졌다개들은 짖고 고양이는 낮잠 자고 샘물은 속절없이 흘러간다그 마을에 종용과 영숙이 산다그들이 떠나고 난 후무송마을은 어떻게 될까아무도 모를 일이다.          





☎ Behind    

 

아빠, 하나의 글로 쓰셔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잖아요. 

그럼 왜 이렇게 많은 질문을 했냐?

‘글을 쓰기 전에 생각해 보세요~’라고 쓰여 있잖아요. 모든 질문에 답을 하는 게 아니라고.  

하,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는구나.

아니, 뭐가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돼요. 화내지 마시고요. 

그냥 질문을 다 빼버리고 붙여버리면 글이 되는 거 아니냐?

하하핫!

그럼 다시 써야 하냐?

아우, 이걸 언제 다시 써요. 못 먹어도 고죠. 그냥 가시죠.      


그건 그렇고 우리 집 외에 두 채만 신식이었다고 쓰셨는데, 어떤 집이 신식 집인 거예요? 

어- 그거는 다른 집들은 전부 흙이랑 돌만 섞어서 만든 집인데, 신식 집은 나무로 집을 지었거든. 마루도 있고. 다른 집들은 지붕 올리는 위에만 나무가 들어가. 근데 우리 집은 대청마루도 있고 툇마루도 있었잖아. 툇마루는 우리 집밖에 없었어.

아빠 저도 툇마루 좋아해요.

그런 집이 진짜 좋아. 그걸 없앤 게 너무 아쉬워.

다시 만들 순 없을까요?

다시 만들 수는 있지. 앞으로 쭉 내어 가지고. 사람이 누우면은 딱 맞는 사이즈로다가. 마루 밑에는 개가 살고. 허드레 것을 많이 넣어놓는. 그런 구조지. 

그러니까 저 늙으면은 툇마루 있는 집에서 살래요.

그래라.     


무송마을이 잘 뭉쳐서 다른 마을이 따라올 수가 없었다는 얘기는 무슨 얘기예요? 

누구 어르신이 돌아가셨다든지. 어느 집에서 제사를 지낸다든지. 누가 시집 장가를 간다든지. 어느 집 애가 태어난다든지 할 때 다들 신경을 썼지. 그건 다른 마을 따라갈 수가 없었지. 우리는 씨족 마을이니까 다 연결돼 있잖아. 다 같이 웃고 울고 했으니까.     

 

샘이라는 게 도대체 어떻게 생겼길래 흘러넘쳤다는 거예요?  

우리 집 옆길로 조금 더 올라가면 지금도 그 샘 있어. 지금 샘이 넘치지 않는 이유는 지하수를 많이 파서 그래. 어릴 적에는 물이 돌 틈에서 막 흘러서 애들이 뛰어놀다가 목마르면 무릎 꿇고 후루룩 마시는 그런 데였어. 거기서는 빨래를 못 했어. 공동으로 먹는 식수이기 때문에. 어르신들이 난리가 났어. 일주일에 한 번씩 청소도 하고. 그러니까 깨끗했었지.      


그 작은 마을에서 말을 키워서 대체 뭘 했대요?

우리 집 옆에 남동양반네 김철균 씨가 말을 두 마리를 키워서 구루마를 운용했어. 마을 사람들이 함평이나 영광 장에 갈 때, 나락 섬 같은 거 잔뜩 싣고 가서 내려주고, 다시 사 오는 걸 싣고 와서 내려주고 삯을 받았지. 

세상에 그 작은 마을에 말도 키우다니…….     


지금은 무송마을에 세 집, 일곱 명 살죠?

그래.

여기서 조상님을 모셔야 한다는 말이 싫지는 않았어요?

싫었지. 싫었는데, 나이 먹어가면서 무슨 뜻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괜찮아진 것 같애. 무송이 없어지지 않는 한 여기서 살아야지. 내가 살던 데니까. 친밀감도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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