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인터뷰 14차__Q. 스무 살에는 어떤 일상을 살았나요?
영숙에게 스무 살에 어떤 날들을 살았냐는 질문을 보내고 하루 뒤에 전화가 왔다. 영숙은 한껏 낮은 톤으로 말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고 별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지 않나. 스무 살이란 건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없는 나이인걸!
나는 스무 살에 강화에서 서울로 왔다. 서울은 언제 어디서나 스파게티와 과일빙수를 사 먹을 수 있는 별천지였다. 서툰 화장을 하고 허연 얼굴로 서울의 중심부를 누비던 촌스럽던 나. 기억력도 좋지 않은 내가, 그런 나의 스무 살 한 해를 얼마나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지 영숙에게 신나게 이야기해 줬다. 영숙은 다시 생각해 보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Q. 엄마, 스무 살에는 어떤 하루하루를 살았어?
캠퍼스에 들어서면 ‘젊은 연인들’이란 노래가 울려 퍼졌어. 대학 가요제가 시작하던 무렵이었거든. 가요가 한 단계 올라선 시기라고 해야 할까? 눈길을 끄는 노래들이 많았지. ‘내가(79년-김학래, 임철우)’, ‘나 어떡해(77년-샌드페블즈)’, ‘가시리(77년-이명우)’ 등등. 그중에서도 내가 정말 좋아했던 노래는 ‘내가’야.
‘가시리’라는 노래는 너무 멋있게 들은 적이 있어. 미팅을 하러 나간 거야. 근데 한 명이 기타를 치면서 그 노래를 부르는데 꼭 가수 같더라고. 육지서 온 사람이었던 거 같아. 제주대학교가 이름은 많이 안 알려졌지만 육지에서도 많이들 지원했어. 국립대였거든. 아무튼, 그런 분위기를 내뿜으면서 노래하는 걸 처음 본 거 같아. 노래가 끝나고 뭘 어떻게 했는지 서로들 짝꿍 찾아서 나갔는데, 나랑 내 파트너는 호구조사만 열나게 하다 헤어졌어.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미팅 비슷한 걸 한다던데 무슨 말들을 하며 놀까 궁금해. 나처럼 사교적이지 못 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런 자리에선 어떤 화젯거리를 미리 생각해 두라는 둥, 그런 걸 가르쳐주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시시콜콜 가르쳐주지 않으면 뭘 모르는 사람이라서 그래.
책에선가 봤는데, 유럽에선 손님을 초대하면 책부터 본대. 담소를 나눌 화젯거리를 찾느라. 좀 충격이었지. 그런 방법을 이제와 알다니……. 나도 미리 할 얘기들을 머릿속에 준비해두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지금까지도 사람을 만나면 조금 긴장이 돼.
그리고 여름방학 숙제를 ‘자전거 타기’로 내준 교수님이 있었어. 무용과 교수님이었는데 연세가 좀 있으셨지만 멋있는 분이었어. 교양 과목으로 무용 시간이 있었거든. 곤봉도 배우고 탁구도 배웠어. 탁구는 중학생이었을 때 배웠지만 아무튼. 방학 동안에 자전거 연습한다고 친구들 몇이 만났던 게 떠오르네. 다들 키가 작아서 작은 자전거를 빌렸어.
핸들과 안장 사이가 V자로 파여 있는 자전거 말이야. 넘어질 때 한쪽 다리를 그리로 빼면 곧 설 수 있으니까, 무섭지 않아서 탈 수 있었어. 방파제가 곧게 뻗어 있는 곳에서 연습을 했는데, 뒤를 잡아주던 친구가 손을 놓아도 간신히 탈 정도가 됐어. 근데 막상 시험을 보려니 한 5초 탔나 봐. 그때 타보고 영영 못 탔던 거 같아.
또 ‘신선한’ 여름방학 과제가 있었어. ‘전쟁과 평화’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서 내던가,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써서 내라는 거야. 다들 영화 보기로 통일하고 하루 날 잡아 영화를 봤어. 영화 속에서 도도하게 보이려는 깜찍하고 귀여운 얼굴의 오드리 헵번이 인상적이었지. 그날 동문 시장인가? 거기 가서 국수를? 아니 냉면을? 먹었던 것도 기억나. 감상문은 어떻게 썼는지 기억에 없어. 혹시 보거나 읽기만 하라고 했나?
제주대학교는 내가 그만두고 나서 다음 해던가 이전했어. 시내에서 많이 벗어난 곳으로. 새로운 부지로 나무를 심으러 한번 갔었어. 내가 다녔던 (구)캠퍼스는 바닷가 바로 옆이었는데, 건물이 온통 담쟁이로 덮여있었지. 제주도에 가면 한번 찾아보자.
등교할 때 보면 그 건물 앞에 남학생들이 잔뜩 서서 담배를 피우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어. 그곳을 혼자서 뚫고 지나가는 게 참 고역이었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홀가분한 자유를 획득했다고 생각했지만, 달라진 환경에 익숙해지지 않아서 살짝 풀죽은 날들이 더러 있었어.
서귀포 친구들도 좀 그랬는데, 한 애가 아는 척을 하더라? 내 친구를 안대.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공부한다는, 전교 1등 하는 애 얘기를 해준 적이 있지? 그 애야. 그 애가 서귀포로 아빠 따라 이사를 가서 학교를 옮겼는데 전교 회장까지 했다는 거야.
그 애 아빠가 서예 선생님이셨어. 제주도에서 상을 맡아 놓고 타는 재능 있으신 분인데 소극적인 성격이셨어. 그 시간에 애들은 소란스럽고 좀 그랬지. 선생님으로 존중을 안 해주는 아이들이 있었으니까.
그 선생님 딸도 조용한 성격이었어. 나서는 법이 없었고. 그러던 애가 서귀포로 전학을 가서는 활달한 성격으로 자신을 다시 세팅한 거야. 게다가 여전히 전교 1등을 유지하면서 전교 회장까지 했대. 놀라운 소식이었지. 부러웠어.
인생의 봄 같은 스무 살의 시간을 이렇게 보냈어.
올 봄에 영숙과 제주도에 다녀왔다. 영숙이 가보고 싶다던 옛 제주대학교 부지에도 찾아갔다. 그곳은 용두암이 코앞에 내려다보이는 얕은 언덕 위였다. 그러나 제주대학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건 육중한 기념비 하나뿐이었다. 몇 년 전에도 있었다던 옛 학교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뒤였고, 그 자리는 제주사대부고가 대신 차지하고 있었다. 시간이 참으로 세차게 흐른 모양이었다. 바다를 빼고는 모든 게 달라져버릴 정도로. 그래도 다행인 건, 기억은 저 깊은 곳에 웅크려 있었을 뿐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 Behind
엄마는 음악을 안 좋아한다고 했잖아.
근데 대학생 때는 음악을 좋아했었나 보네?
음악을 안 좋아한 건 한동안이었어.
엥?
엄마가 노래는 잘 못 불러도 음악을 좋아하긴 했지,
한동안 엄마 마음이 좀 안 좋았을 때,
감정이 노래에 휩쓸리고 그랬을 때,
음악을 잠깐 멀리했던 거야.
아, 그렇구나. 그건 몰랐네.
난 또 옛날에 대답한 것만 철썩같이 믿고,
우리 엄마는 음악 하나도 안 좋아하는 줄 알았네.
얘는~~~
엄마, 자전거는 왜 그 후에 다시 타볼 생각을 안 했어?
그럴 기회가 없었던 거 같아.
무슨 기회?
자전거방이 어디에나 있는 게 아니잖아.
제주시에도 한군데밖에 없었을걸?
그리고 아저씨들이 짐 나르는 거 같은
큰 자전거는 많이들 타고 다녔는데,
엄마가 연습했던 가운데가 뚫린
작은 자전거는 별로 없었어.
옛날에는 지금보다 더 자전거 많이 타지 않았어?
그랬겠지. 차가 별로 없던 때니까.
세월이 흐르고서는 왜 안 배워봤어.
누가 뒤에서 잡아주고 그래야 하잖아.
나한테라도 잡아달라고 하지.
너 커가지고는 바빴잖아.
아, 내가 그랬나?
하긴... 엄마. 20대에 접어든 자식들은
엄마고 아빠고 동생이고 가족이고 그딴 거 몰라.
나처럼 나이 좀 먹어봐야 알지. ㅋㅋㅋ
저번에 제주대학교 부지에 찾아갔을 때
아무것도 없어서 엄마 서운했겠다.
그러게.
아예 없어질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데.
엄마, 세상에 모든 건 다 없어지는 거야.
그래.
엄마의 옛날 집도 얼마 안 가 없어질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알았어. ㅋㅋㅋ 미리 없어질 거라고 예상하고 있을게.
그리고 정 속상할 거 같으면 다시는 거길 가지 마.
그럴까?
그리고 기사로 봤는데
김중업 건축가가 지었던
제주대학교의 옛 본관 건물을 다시 복원할 수도 있대.
그래?
응, 혹시나 모르니까 기다려보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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