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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맏딸 Aug 19. 2022

종용’s answer. 추신에 흘려 넣은 본심(?)

아빠 인터뷰 17차__Q. 아빠의 스무 살 봄은?

       


종용이 고등학교 3학년 시절에 해병대에 입대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스무 살 봄에 생긴 일을 묻기가 난감했다힘들었겠지그 시절의 해병대라니 정말 죽을 만큼 괴로웠겠지그래도 스무 살의 봄다운 추억이 어떻게 하나도 없었겠나군대에도 봄바람은 불고 종용의 마음은 이리저리 일렁였을 것이다          





Q. 아빠스무 살 봄에 어떤 삶을 살고 계셨어요?     

       




나 김종용이는 1977년도 8월 4일에 입대하여 한여름 날씨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로 경남 진해에서 해병대 하사관 전반기 교육훈련에 열심히 임하고 있었습니다.     





민간인에서 군인으로 탈바꿈하고 있던 그때. 밤낮을 가리지 않고 훈련하며 쪽잠을 자면서 새벽 별을 봤고 가슴속으로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그 시절 훈련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다.’라는 마음으로 군 생활에 첫발을 디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해에서 받은 전반기 교육훈련에는 130명이 참여했는데 그중 도중 탈락자인 갈태근(?) 외 2명이 집으로 돌아가고 총 127명이 수료했습니다. 이후 병과가 분류됐습니다. 보병 병과 27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특과로 선발됐습니다. 나는 보병으로 선발됐지요.      





전반기 교육이 끝나갈 때만 해도 아주 좋았던 기분이 조금 언짢아졌습니다. 특과인 포병, 통신, 기갑, 공병 등 병과의 후반기 교육은 병과 별 학습 교육이었지만, 보병만큼은 모든 교육이 육체적인 교육이라 너무나 힘들다는 말을 미리 들었기 때문입니다. 보병으로 포항에 가서 4개월 동안 힘든 교육을 받을 처지가 됐습니다. 운명에 울고 낙심했지만 어차피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기로 했으니 좋은 마음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전반기 하사관 교육훈련이 끝나고 나면은 수료식이 이어집니다. 수료식 때는 가족들과 면회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난 아무리 생각해도 면회를 올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면회 장소로 가지 않고 바로 병사로 돌아와 포항으로 갈 짐을 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소대장님이 날 부르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누님이 면회를 왔다고 하길래 처음에는 거짓인 줄 알았답니다. 도저히 올 수가 없을 때였으니까요. 그때 누님은 조카를 임신하고 있었고 출산일도 얼마 남지 않았었거든요. 누님의 얼굴을 뵈니 얼마나 반갑고 고맙던지 만나자마자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하지만, 면회가 끝났을 때는 누님이 무거운 몸으로 그 먼 길을 어떻게 다시 돌아갈지 걱정이었습니다.       





77년 10월 말경에는 해병대 포항 훈련소로 이동해 후반기 교육훈련을 시작했습니다. 27명이라는 소수 인원에 소대장 3명, 교관 2명이 같이 훈련했습니다. 후반기 교육은 전문 교육이 주를 이뤘지만 맨날 배운 걸 복습하느라 정말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기습 특공 교육훈련, 유격훈련으로 3개월간 교육을 받고 이어서 1개월간 공수 교육을 받은 후에 하사 계급장을 달았습니다.      





첫 휴가를 나와 시골집에 도착한 건 78년 2월 8일이었습니다. 다음날이 고등학교 졸업식이었는데 참석하여 부러움도 한껏 받았습니다. 그날 폼도 좀 내고 나름대로 자부심이 엄청났었지요. 하지만, 훈련할 때 지옥을 몇 번이나 왔다리 갔다리 했기 때문에 교육훈련 기간은 별로 떠올리고픈 기억이 아니랍니다.     



 


휴가 귀대 후 다음 날에는 각자 배정받은 부대로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사관들이라고 아무도 데려다주는 이 없이 각자 부대로 찾아가야 했습니다. 나는 김포 해병 제2여단으로 가게 됐습니다. 


동기생 5명과 함께 김포 마송리에 있던 여단본부에 도착하니, 신고 후 바로 2명은 강화부대로 가라는 게 아니겠습니까? 강화군 부근리에 위치한 부대로 찾아갔더니 다시 신고 후 신상명세서를 쓰고 다음 날 교동에 있는 중대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난생처음 교동 땅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본격적인 나의 군 생활도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78년도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너무나 끔찍하고 무서운 해가 됐습니다. 내가 적응을 잘 못해서였는지 아니면 건달 선배님들을 만나서 그랬는지는 아직도 판단이 잘 내려지지 않습니다. 어쨌든 78년도 군 생활은 나를 더 강하고 끈질기게 만드는 계기가 됐습니다.     




      

<추신> 

그때의 군 생활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하사관 선배들의 천국이었습니다. 후배들은 매일 얻어터지면서도 선배들에게 OO을 사주어야 하는 시대였지요. 저녁마다 맞지 않으면 잠도 잘 수 없었습니다. 병들도 자기네끼리는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사관의 힘이 강해서 병들은 하사관에게 꼼짝도 못 했습니다.   

   

특히, 강화 교동에서 장교라고는 중대장뿐이었는데, 17시 이후 중대장이 퇴근해 버리면 대룡리에 몰려가 OO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그래도 군대라고 근무자들은 철저히 근무에 임했다는 게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나 김종용이의 스무 살 봄의 하루는 이렇게 흘러갔습니다. 교동은 전방이라서 저녁 내내 올빼미로 근무를 섰습니다. 그러다가 일출 30분 전에 철수해서 총기를 닦고 실탄을 확인하고 셈하여 이상이 없으면 탄약고에 집어넣었습니다. 그 후에는 청소하고 아침밥을 먹고 7시 반 정도에 내무실로 들어가 취침을 했지요.


다시 14시에 기상하면 새로운 하루의 일과가 시작됐습니다. 점심을 묵고 17시 30분에 저녁을 묵고 전방 근무를 투입시키고, 나는 전방에 순찰을 나가서 24시경에 야참을 묵고 또 아침에 철수하는. 그런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을 했다는 겁니다.     





종용의 스무 살 봄은 <추신>에 들어있었다. <추신>의 맨 아랫줄에는 적힌 그대로 다 공개하면 안 되니 많은 수정이 필요하다.’는 메모가 덧붙어 있었다그대로 다 공개할 수는 없는 나날들타임테이블이 빼곡히 채워진 일상 속에서 종용은 마음이 일렁일 겨를도 없이 봄을 보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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