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용’s answer. 추신에 흘려 넣은 본심(?)

아빠 인터뷰 17차__Q. 아빠의 스무 살 봄은?

by 김맏딸



종용이 고등학교 3학년 시절에 해병대에 입대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스무 살 봄에 생긴 일을 묻기가 난감했다. 힘들었겠지. 그 시절의 해병대라니 정말 죽을 만큼 괴로웠겠지. 그래도 스무 살의 봄다운 추억이 어떻게 하나도 없었겠나? 군대에도 봄바람은 불고 종용의 마음은 이리저리 일렁였을 것이다.





Q. 아빠, 스무 살 봄에 어떤 삶을 살고 계셨어요?





나 김종용이는 1977년도 8월 4일에 입대하여 한여름 날씨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로 경남 진해에서 해병대 하사관 전반기 교육훈련에 열심히 임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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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에서 군인으로 탈바꿈하고 있던 그때. 밤낮을 가리지 않고 훈련하며 쪽잠을 자면서 새벽 별을 봤고 가슴속으로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그 시절 훈련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다.’라는 마음으로 군 생활에 첫발을 디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해에서 받은 전반기 교육훈련에는 130명이 참여했는데 그중 도중 탈락자인 갈태근(?) 외 2명이 집으로 돌아가고 총 127명이 수료했습니다. 이후 병과가 분류됐습니다. 보병 병과 27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특과로 선발됐습니다. 나는 보병으로 선발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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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기 교육이 끝나갈 때만 해도 아주 좋았던 기분이 조금 언짢아졌습니다. 특과인 포병, 통신, 기갑, 공병 등 병과의 후반기 교육은 병과 별 학습 교육이었지만, 보병만큼은 모든 교육이 육체적인 교육이라 너무나 힘들다는 말을 미리 들었기 때문입니다. 보병으로 포항에 가서 4개월 동안 힘든 교육을 받을 처지가 됐습니다. 운명에 울고 낙심했지만 어차피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기로 했으니 좋은 마음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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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기 하사관 교육훈련이 끝나고 나면은 수료식이 이어집니다. 수료식 때는 가족들과 면회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난 아무리 생각해도 면회를 올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면회 장소로 가지 않고 바로 병사로 돌아와 포항으로 갈 짐을 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소대장님이 날 부르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누님이 면회를 왔다고 하길래 처음에는 거짓인 줄 알았답니다. 도저히 올 수가 없을 때였으니까요. 그때 누님은 조카를 임신하고 있었고 출산일도 얼마 남지 않았었거든요. 누님의 얼굴을 뵈니 얼마나 반갑고 고맙던지 만나자마자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하지만, 면회가 끝났을 때는 누님이 무거운 몸으로 그 먼 길을 어떻게 다시 돌아갈지 걱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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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년 10월 말경에는 해병대 포항 훈련소로 이동해 후반기 교육훈련을 시작했습니다. 27명이라는 소수 인원에 소대장 3명, 교관 2명이 같이 훈련했습니다. 후반기 교육은 전문 교육이 주를 이뤘지만 맨날 배운 걸 복습하느라 정말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기습 특공 교육훈련, 유격훈련으로 3개월간 교육을 받고 이어서 1개월간 공수 교육을 받은 후에 하사 계급장을 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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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휴가를 나와 시골집에 도착한 건 78년 2월 8일이었습니다. 다음날이 고등학교 졸업식이었는데 참석하여 부러움도 한껏 받았습니다. 그날 폼도 좀 내고 나름대로 자부심이 엄청났었지요. 하지만, 훈련할 때 지옥을 몇 번이나 왔다리 갔다리 했기 때문에 교육훈련 기간은 별로 떠올리고픈 기억이 아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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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귀대 후 다음 날에는 각자 배정받은 부대로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사관들이라고 아무도 데려다주는 이 없이 각자 부대로 찾아가야 했습니다. 나는 김포 해병 제2여단으로 가게 됐습니다.


동기생 5명과 함께 김포 마송리에 있던 여단본부에 도착하니, 신고 후 바로 2명은 강화부대로 가라는 게 아니겠습니까? 강화군 부근리에 위치한 부대로 찾아갔더니 다시 신고 후 신상명세서를 쓰고 다음 날 교동에 있는 중대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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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교동 땅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본격적인 나의 군 생활도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78년도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너무나 끔찍하고 무서운 해가 됐습니다. 내가 적응을 잘 못해서였는지 아니면 건달 선배님들을 만나서 그랬는지는 아직도 판단이 잘 내려지지 않습니다. 어쨌든 78년도 군 생활은 나를 더 강하고 끈질기게 만드는 계기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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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그때의 군 생활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하사관 선배들의 천국이었습니다. 후배들은 매일 얻어터지면서도 선배들에게 OO을 사주어야 하는 시대였지요. 저녁마다 맞지 않으면 잠도 잘 수 없었습니다. 병들도 자기네끼리는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사관의 힘이 강해서 병들은 하사관에게 꼼짝도 못 했습니다.


특히, 강화 교동에서 장교라고는 중대장뿐이었는데, 17시 이후 중대장이 퇴근해 버리면 대룡리에 몰려가 OO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그래도 군대라고 근무자들은 철저히 근무에 임했다는 게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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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나 김종용이의 스무 살 봄의 하루는 이렇게 흘러갔습니다. 교동은 전방이라서 저녁 내내 올빼미로 근무를 섰습니다. 그러다가 일출 30분 전에 철수해서 총기를 닦고 실탄을 확인하고 셈하여 이상이 없으면 탄약고에 집어넣었습니다. 그 후에는 청소하고 아침밥을 먹고 7시 반 정도에 내무실로 들어가 취침을 했지요.


다시 14시에 기상하면 새로운 하루의 일과가 시작됐습니다. 점심을 묵고 17시 30분에 저녁을 묵고 전방 근무를 투입시키고, 나는 전방에 순찰을 나가서 24시경에 야참을 묵고 또 아침에 철수하는. 그런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을 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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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용의 스무 살 봄은 <추신>에 들어있었다. <추신>의 맨 아랫줄에는 ‘적힌 그대로 다 공개하면 안 되니 많은 수정이 필요하다.’는 메모가 덧붙어 있었다. 그대로 다 공개할 수는 없는 나날들, 타임테이블이 빼곡히 채워진 일상 속에서 종용은 마음이 일렁일 겨를도 없이 봄을 보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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