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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맏딸 Jul 12. 2022

종용’s answer. 벽보 그리고 천생 직업

아빠 인터뷰 16차__Q. 아빠의 꿈은 무엇이었나요?



나이를 먹을수록 큰 꿈은 사라져 가고 작은 꿈들만 남는다. '하루에 만보씩 걸어서 5kg 빼야지하루에 한 시간씩 영어공부해야지. 한 달에 오십 만원씩 모아서 해외여행 가야지.' 그런 작은 것들이 꿈의 자리를 차지해 버린 요즘아주 오랜만에한 사람의 인생을 설계하는 큰 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Q. 아빠고등학교 졸업 전에 어떤 꿈을 갖고 있었어요?     

    




나 김종용이는 어린 시절에는 꿈이 없었다. 꿈이 뭔지도 몰랐으며 저녁에 꿈꾸는 게 꿈인 줄 알 정도로 꿈이 뭔지 전혀 모르고 살아왔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그저 하루 종일 집안일하고 욕먹지만 않으면 된 거라고 생각하며 생활했다. 아마 그때 그 시절에 자기 앞날을 꿈꾸며 사는 아이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중학교 시절에는 선생님들이 자주 말씀하셔서 장래에 뭐가 될 것인지 꿈이 뭔지 조금씩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장래 희망이 바뀌었다. 1학년 때는 멍청해서인지 아니면 현실주의자였는지 자전차포 주인이 되었으면 했다. 그 많은 자전거를 진열해놓고서 이것저것 팔고 사고 또 기술을 배워서 고쳐주기도 하면서 학교에서 멀지 않은 데서 살고 싶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가게를 하면서 도장 파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 친구 하나가 집이 신광 면소재지에 있었는데, 학교 끝나고 나면 가게에서 도장을 파서 돈을 벌었다. 힘을 들이지도 않으면서 돈을 버는 모습을 보니 부러움이 무지하게 생겼다. 멀리 뚝 떨어진 함정리가 아니라 면소재지에서 살고 싶은 마음도 컸던 것 같다.      




3학년 때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면서 살아간다는 게 좋아 보였다. 기술 선생님께서는 고향이 신광이신데 유천리라는 동네에서 출퇴근하면서 사신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간에 꼭 선생님이 되어 우리 마을에서 신광중학교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쭉 같이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장래희망을 물어보시는 선생님들께 늘 집에서 농사지으면서 살아갈 생각이라고 말씀드렸다. 이유인즉슨, 너같이 공부도 못하는 놈이 무슨 놈의 장래희망이 있겠냐고 할까 봐 그랬다. 내가 좀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그런데, 정작 집에서 어머니께 앞으로 나는 농사나 지으면서 시골에서 살겠다고 하면은 “너 같은 놈이 무슨 농사를 짓냐? 에라이 이놈아 개소리하지 말고 소나 띠기고 와라. 아주 지랄허고 자빠졌내.” 하시니 난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상한 놈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고등학교를 함평농고로 진학하니 정작 농사꾼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꿈이나 장래희망 같은 건 생각지도 못했다. 등하교가 너무나 힘들고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맨날 일만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지겹고 지겨운, 이 괴롭고 괴로운 일만 하지 않는다면 뭘 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었다.     


 



2학년 때는 대학에 진학할 학생들은 공부를 하고, 진학하지 못할 학생들은 학교에서 일을 하든가 실습을 나가야 했다. 나는 농과였는데 축산업을 하는 소막에서 실습을 하라고 해서 나가본 적이 있다. 실습장에 도착해서 아저씨한테 실습을 나왔다고 하니 종장에서 일해본적 있냐고 물었다. 집에서 소와 돼지를 키워서 가르쳐만 주면 할 수 있다고 답했다.      


첫날에는 하루 종일 소막에서 똥만 치우고 저녁이 됐다. 밥 먹자고 해서 밥을 먹는데 자기들 상과 우리 학생 두 명의 상차림이 너무 달랐다. 자기들은 진수성찬이고 우리는 김치 깍두기와 알지도 못한 먹거리를 내줬다. 그래도 숟가락을 들고 먹었다. 다음날에는 새벽 5시에 일어나 다시 소막 치우고 소밥 주고 8시 반 정도에 아침 먹고 또 소똥을 치웠다.      





점심을 주는 건지 안 주는 건지. 함께 실습 나간 내 친구도 신경질이 너무 나서 오후 1시 반 정도에 점심은 안주냐고 물어봤더니 밥 쳐묵으러 왔냐고 한다. 일을 시키려면 밥은 줘야 되지 않느냐고 하니까, 일도 못하는 것들이 밥만 쳐묵으려고 한다기에 다 때려치우고 이틀간 일한 돈을 달라고 했다.      


돈은 못주니까 그냥 가라는 말에 함평경찰서에 가서 신고하고 학교에 가서 실습생 안 하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선생님이 엄청 화를 내셨지만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니 놀라시면서 잘 왔다고, 학교로 등교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한참 학교에 다니다가 3학년 1학기 때 서울에 갔다. 뭐 하러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친구 놈들이 서울 구경이나 하자고 해서 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용산 어딘가에서 자고 후암동 길을 걷고 있는데 벽보가 하나 붙어있었다.      


공수부대 지원자, 육군 준위 지원자, 그다음 해병대 하사관 지원자 포스터였다. 눈에 쏙 들어온 건 해병대 하사관이었다. 어디어디로 오라고 적혀 있어서 후암동 구해병대사령부 자리에 가니까 중사가 앉아있었다.     

 

나는 용감하게 해병대 하사관 모집 포스터를 보고 왔다고 말했다. 지원서를 쓰라고 해서 착실히 써서 제출하니, 현재 고등학교 3학년이면 졸업하고 내년에 입대하란다. 나는 2학기 때 실습생으로 해놓고 군에 가도 된다고 말했다. 그제야 접수증을 주며 나중에 구 해군본부 자리에서 체력 측정과 시험을 보라고 했다.        





체력 측정과 시험을 통과하고 학교에 가서 선생님께 2학기 때는 다시 실습을 나가겠다고 했다. 뭔가 이상하신지 꼬치꼬치 캐물으신다. 할 수 없이 해병대 하사관으로 지원했고 체력 측정과 시험에 합격해 2학기 때 입대해야 한다고 도와달라고 말씀드렸다. 선생님께서는 실습지에 가서 실습생이라는 확인을 받아오라고 하셨다. 곧장 친구가 있는 목장으로 가서 주인아저씨에게 실습생 확인서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일이 잘 풀려서 실습생 확인서를 제출하고 입대했다. 입대 날짜는 1977년 7월 4일이었다. 전반기, 전후반기 훈련을 6개월, 공수 훈련을 4주 동안 하고서 하사를 달고 1978년 2월 8일에 휴가를 나왔다. 다음날인 2월 9일은 졸업식이었다.      





해병대 위장복에 정글화에 링 차고 선글라스 쓰고 학교로 들어갔더니 아무도 몰라봤다. 교무실에 들어가 담임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니 나를 쳐다보시면서 “고생이 많았구나, 니 눈밖에 안 보인다.”고 말씀하셨다. 어찌나 고마운지 눈물이 날 뻔했다. 졸업식에 참석하니 그제야 친구들이 얼마나 고생했냐며 알아봐 줘서 마음이 울컥하기도 했다.     


이상 끝이다.



종용이 해병대 하사관 모집 포스터를 본 것은 시골 농사꾼이 되고 싶지 않은 무의식의 발로였을까아니면지긋지긋한 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발버둥이었을까그것도 아니면 일종의 운명이었을까군인이 아닌 종용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꿈은 열심히 준비하지 않아도 내 앞에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있는 것 같다.     



         

         

☎ Behind     

아빠, 서울에서 해병대 하사관 모집 벽보를 못 봤으면, 

아빠는 어떤 직업을 갖게 됐을까요?

백 프로 농사꾼을 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군대는 꼭 갔을 테니까,

육군에 갔으면 육군 하사관이 됐을까요?

그렇지. 

벽보를 봤을 때, 

처음부터 직업 군인이 되려는 생각은 아니었죠?

아니었지, 전혀 아니었지. 

4년 6개월이라고 했거든.

딱 그만큼만 군대 생활하고 나오려고 했지.

그럼 군인이 되기로 언제 결정한 거예요?

4년 6개월이 되기 전에

해병대 훈련소 훈련교관 임무를 수행했거든.

그때 자부심이 대단히 강해졌지.

해병대에 처음 입대하는 병사들을 가르쳐서

해병대 조직의 일원으로 만들어 낸다는 것이.

아하!

그리고 엄마하고 결혼을 해서 그런 것도 있었어.

안정적으로 살아가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현실주의적으로 변했지.     


괜히 군대에 갔다고 후회한 날은 없었어요?

한번 후회한 적은 있었는데

중사였을 때 내 대원이 정신병동에 입원을 했어.

그때 후회스러운 감정이 많이 생겼어.

나 때문에 저 아이가 저렇게 됐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

나중에 알고 보니까 집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더라고. 

그 아이 부모들로부터 그런 얘기를 듣고 좀 사그라졌어.


아빠는 역시 군대가 체질이었죠?

아니, 무슨 체질이야. 힘들었지.

그래도 군인이 된 거 후회 안 하시죠?

나는 군인을 평생 직업으로 삼은 게 아니고

천생 직업으로 삼았어.

지금도 군대에 있는 느낌으로 살아.

그건 너무 슬픈데요?

지금도 군복을 입고 있으면 좋고.

어딘가 마음이 편안해. 

진환이를 보면 나를 보는 느낌이라 되게 좋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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