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인터뷰 15차__Q.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종용의 글을 읽자마자 드라마 도깨비에서 삼신 할매가 했던 대사가 생각났다.
“아가, 더 나은 스승일 순 없었니?”
“더 빛나는 스승일 순 없었어?”
Q. 아빠,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학창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을 꼽으라면 초등학교 1학년부터 5학년 때까지 담임 선생님이셨던 ‘김대수 선생님’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성함은 가명을 사용하는 것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 선생님과의 좋은 추억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함께 학교생활을 했던 친구들은 지금까지도 ‘김대수 선생님’이라고 하면은 거의 다 신경질을 냅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선생님을 하셨다고 밖에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1, 2학년 때는 전혀 생각이 나질 않지만,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계속적으로 학생들을 괴롭히고 늘 기합만 주는 그러한 선생님이셨습니다. 자기 딸내미는 ‘선희’라는 아이였는데 우리와 같은 학년으로 학교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기합을 줄 때쯤이면 심부름을 시키거나 교무실에 보내서 자기 딸내미만큼은 절대로 매질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는 우리가 김대수 선생님께 무엇 때문에 얻어터졌고 얼마나 맞았는지, 그 내용을 하나씩 기억해내 보겠습니다. 김대수 선생님께 원한이나 나쁜 감정은 없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도 그저 ‘그런 일이 있었구나.’ 추억하기만 하시고, 절대로 김대수 선생님을 미워하거나 비난하지는 말아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아무리 악한 선생님이라고는 하나 내 은사님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3학년 때 일입니다. 누군가 연필이 없어졌다고 했고 그걸 선생님한테 일러바쳤습니다. 처음에는 좋게 연필을 가져간 놈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나가면 뒤지게 얻어터진다는 걸 알고 있는데 누가 나가겠습니까? 아무도 나오지 않으니까, 다음 순서로 솔잎을 다섯 개씩 따오라고 했습니다. 그걸 입에 물고 있으라고 하더군요. 눈을 감은 채로요. 도둑놈은 떨고 있으니까 분명히 표시가 난다며 어서 나오라고 했습니다.
한 시간 동안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는 솔잎을 들고 한 명씩 앞으로 나가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진척이 없자, 모두 의자를 들고 책상 위로 올라가라며 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의자를 들고 꿇어앉아 시간이 흐르니 여기저기서 우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은 우는 아이들의 뒤쪽으로 가서 막대기로 머리를 사정없이 후려쳤습니다.
그때는 그 선생님이 교장 대리를 하고 계셔서 다른 선생님께서는 감히 말리지도 못했습니다. 결국에는 앞에서부터 한 명씩 책상 위로 올라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다리 쪽 인대를 막대기로 후려쳤습니다. 얼마나 아픈지 여자들은 까무러치고 남자아이들은 비명을 질렀습니다.
정말 학교 다니기가 싫어지고 또 싫어졌습니다. 교실 안이 비명 소리로 난리도 아니었으니까요. 이런 일이 4학년 때도 일주일에 3회 정도는 일어났습니다. 맨날 폭언을 들으며 얻어터지면서도 학교에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딸내미는 전혀 맞지 않고 학교에 다녀서 우리가 보복하기도 했습니다. 학교 파하고 하교할 때면 그 딸내미를 골탕 먹이고 장난치는 척하면서 은근히 패기도 했습니다. 물론 제 아버지한테 일러바치면 또 그 다음날 총원이 얻어터지고 공부는 하나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기합만 받고 집으로 가곤 했지요.
또한 옛날에는 가정방문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무송마을에 오신다고 하면 일주일 전에 통보가 왔습니다. 그러면 동네에서는 어떻게 선생님을 맞이할까 걱정을 했지요. 당일에는 부모님이 일하러 가지도 않고 닭도 잡고 막걸리도 만들고 쇠주도 사다가 한상 그득하게 차려놓고는 선생님을 상전 모시듯 했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실 때는 집집마다 쌀이며 닭이며 오리며 계란이며 싸주셔서 혼자서는 집으로 가져갈 수가 없을 정도였지요. 선생님은 이미 술에 취해서 해롱해롱하고 있으니 그 많은 물품을 또 우리가 짊어지고 선생님 댁까지 가져다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딱 한 마디 “가거라.”가 전부였습니다.
다음날 학교에 가면은 가정방문 시 옆에 없었던 아이들이 뒤지게 얻어터졌고, 또 다른 마을로 가정방문을 가셨습니다. 가정방문이 얼마나 많은지 말로 다 못 하고, 지금 생각하면은 우리 부모님들이 선생님들을 먹여 살렸다고 봐야 합니다.
선생님들이 가정방문 오시면 우리는 집에서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누구도 자기 집에 선생님이 오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그리 했겠습니까? 참으로 한심한 세상이었습니다.
5학년 때는 누가 또 거짓말을 했는지 학생들을 모두 다 책상 위에 꿇려 앉혀 놓았습니다. 의자를 들고서요. 앉아서 반성하고 거짓말한 놈은 나오라고 기합을 받는 중이었습니다. 학생들은 너무 힘들어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5학년 때는 교장 선생님이 부임해 계실 때였습니다.
교실에서 우는 소리가 나자 교장 선생님이 교실 밖에서 보고 계시다가 안으로 들어오셔서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전부 다 책상에서 내려오라면서요. 우리는 책상에서 내려왔고, 교장실로 들어간 선생님들 사이에서 큰소리가 오갔습니다. 그때부터 김대수 선생님은 우리 반 담임을 할 수 없게 됐고, 새로 오신 총각 선생님, 김재풍 선생님께서 담임을 맡으셨습니다.
그 후로 6학년 때까지 학교생활을 아주 재미있게 했습니다. 김대수 선생님은 본교인 신광초등학교로 전근을 가셨지요. 내가 40세 정도 됐을 때 신광북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선생님들을 초대하자는 말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김대수 선생님은 제외하자는 의견이 90퍼센트가 넘어서 은사님 초청은 아예 무산됐습니다. 김재풍 선생님은 꼭 모시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서 죄스러울 뿐이었습니다.
하여간 어린 시절에 너무나 많은 구타와 얼차려를 받아서인지, 지금도 우리 1회 졸업생 친구들은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는 더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 친구들을 보고 있노라면 조금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이런 기억이 떠올라서 기분이 너무나 안 좋구나, 해영아. 내 기억 속에는 왜 이리 아픈 기억만 존재하는지. 마음이 아리구나. 이상 끝.”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학생들을 맨 쥐어패기만 했던 선생이라는 건 참으로 슬픈 일이다. 더욱 슬픈 건 종용이 그 선생님을 ‘은사(恩師)’라고 표현했다는 것이다. 가르침을 받은 은혜로운 스승이라는 뜻의 은사라니. ‘사랑의 매’라는 표현이 가능했던 시절.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개인의 화풀이가 훈육의 한 가지 방법으로 둔갑하던 시절. 스스로를 달래며 그래도 나의 스승이라고 몇 번이고 되새겼을 종용의 마음에 이제라도 빨간약을 발라주고 싶다.
☎ Behind
그 선희라는 아이는
자기 아빠가 그렇게 나쁜 짓을 하는데
미안해하지도 않았어요?
많이 미안해했지.
그 애는 참 애가 좋았거든.
즈그 아버지 빽 믿고 나서고 그러진 않았어.
그 애는 애들이 욕을 안 했어.
즈그 아빠가 기합 주면 저도 가서 기합 받고,
때리면 맞기도 하고 그랬어.
그 친구는 나중에 만난 적 있어요?
못 만났어.
그 선생님은 신광 국민학교로 가시고
쭉 잘 지내셨대요?
쭉 잘 지내셨나 보더라?
그때도 나이가 많았었거든.
정년 퇴임하고 신광에서 살았다는 얘기가 있더라.
그러다가 돌아가셨대.
누구라도 대들기라도 하지,
어떻게 맞고만 있었어요?
옛날에 선생님들한테 대들면
아버지나 누구한테 맞아 뒈졌거든.
어디 선생님한테 그러냐고.
망할 노무 새끼라고.
옛날엔 다 그랬어.
가정 방문했을 때
선생님 대접 안 하면 어떻게 됐어요?
가서 또 뒤지게 맞지.
다른 이유를 대서 때리는 거지.
다친 애들은 없었어요?
하나도 없었어. 다 잘살았어.
병신 된 애도 없고.
(아... 그렇구나.)
#강화 #교동 #난정저수지 #일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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