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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맏딸 Jun 14. 2022

종용’s answer. 장날에 원숭이가 쇼를 했다고요?

아빠 인터뷰 14차__Q. 그 시절 시장 풍경은 어땠어요?

      

빨간 대야에 빨간 딸기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영숙이 지폐 두 장을 내밀며 이천 원어치만 달라고 말했다딸기 아주머니(?)는 검은 봉다리의 아가리를 벌리고 하얀 사기그릇으로 수북이 두 번 정도 퍼 담았다저울에 올린 딸기의 무게가 몇 그램을 가리키든 예닐곱 개 더 담아주는 게 예사였다그러지 않으면 박해 보이는 시대였으니까아홉 살쯤 나의 시장 구경은 그랬다종용의 시장 구경은 어땠을까?            


   



Q. 아빠어린 시절에 시장 갔던 기억이 나세요?    

       




장날은 늘 신나는 날이었다. 어린 시절, 나 김종용이 자주 가는 장은 사납장(신광장), 영광장, 포천장, 염산장이었다. 각자 날짜가 정해져 있었는데 전부다 5일 간격이었다. 사납장(신광장)은 5/10일, 영광장은 1/6일, 일 년에 5회 정도 가는 포천장은 4/9일, 일 년에 두 번 정도 가는 염산장은 3/8일, 정말 어쩌다가 한 번 가는 함평장은 2/7일에 열렸다.     


전통시장 풍경은 난리도 아니었다. 물건을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흥정하는 걸 보면 꼭 싸움하는 것 같았다. 또 어느 장에 가나 원숭이를 데리고 와서 쇼하는 장사치도 엄청 많았다.  



   


처음 소개는 ‘사납장(신광장)’부터 하겠다. 장날이면 도롯가에는 뜨내기 장사치들이 좌판을 깔아놓고 장사를 했고, 진짜 장사치들은 다 자기 매장이 있어서 시장 안으로 들어가야만 만날 수 있었다. 맨 안쪽에는 동물을 사고파는 장터까지 있었다. 소는 송아지만 사고팔았는데, 그 시장은 주로 오전이면 파장했다.      


주위에는 국밥집이 많아서 점심 먹는 사람들과 한 잔씩 하시는 어르신들이 왁자지껄했다. 어린 내가 보기에 장날 하루만큼은 맨 술 먹는 사람 천지였다. 진짜로 필요한 물건을 사러 오신 분들은 오전 중에 장터를 벗어나서 가신 것이다.      


마을에서 다 함께 오신 어머님들은 국밥을 한 그릇씩 드시고 짐을 챙겨서 머리에 이고 갔다. 일꾼이라도 있는 집의 어머니들은 일꾼이 짐을 지게에 지고서 다 함께 마을로 돌아가곤 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장날에 벤또를 싸가지 않고 점심시간에 할머니를 찾아 나섰다. 학교에서 3분이면 장터에 갈 수 있으니, ‘대충 이 시간이면 할머니가 어디에 계시겠구나?’ 생각하고 달려 나간 것이다. 할머니를 만나면 국밥집에 가서 국밥을 묵고 학교로 재빨리 복귀했다.      


사납장 장날에는 운동화가 그렇게 사고 싶었다. 처음으로 운동화를 사 신은 것이 중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다. 그날 장터에서 할머니한테 졸라대니, 지금 신고 있는 신발도 좋은데 왜 자꾸 운동화를 사달라고 하느냐며 한소리를 하셨다. 나는 고무신 신고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나밖에 없을 거라고 하면서 내 친구들을 데려와 보여드렸다.      




친구들이 전부 운동화를 신고 있어서 어쩔 수가 없으셨는지, 신발가게에 가서 처음으로 내가 골라잡은 신발을 사고야 말았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그 신발은 학교에서만 신고 등하교 시에는 고무신으로 갈아 신고 다니기도 했다. 그 후부터는 운동화를 2개월에 하나씩 사주셨다. 시장표라서 신발이 자주 찢어져서 어머님이 바늘로 기워주시기도 했었다.      


사납장 풍경이 어땠냐면, 학교에서 쭉 내려가면서부터 뜨내기장사치가 좌판을 깔아놓고 장사를 했다. 장터 안으로 들어가면 보통 자기 개인 좌판이나 상점을 가진 사람들이 수산물이나 채소류, 과일류를 팔았다. 그 뒤에는 옷 가게가 있었고, 농기계류, 뻥튀기 가게, 과자점, 국밥집이 시장을 빙 둘러 에워싸고 있었다.    


맨 끝에는 동물을 파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부근에 국밥집이 많은데 많이 주고 맛도 일품이었다. 대체로 시장은 오후 3시에서 4시경이면 파장이었는데, 국밥집에는 어르신들이 도야지 고기를 놓고 약주를 드시고 계셨기 때문에 해 질 녘이 되어야 파장했다.     


 



‘영광장’에서는 우리 가족이 너무나 고생했다. 할머니가 직접 재배한 채소를 영광장에 내다 팔았기 때문이다. 우리 할머니는 깨밭이나 밭고랑에 열무와 얼갈이배추를 심었다. 그게 다 자라면 뽑아서 저녁 내내 다듬어 단을 만들고 리어카에 실어 놓았다. 다음 날 새벽 4시에 리어카를 끌고 할머니와 제주 누이와 내가 함께 영광장으로 출발했다.      


우리 집에서 영광장까지는 거리가 10km 정도가 된다. 엣등에서 영광 쪽으로 기수를 돌려 리어카를 밀고 당기며 잔등만 넘어도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다음에는 연화동을 지났고 선들저수지 앞에 도착하면 직선 길이 없어서 산을 한 바퀴 돌아서 넘어갔다. 거기만 넘어가면 높은 잔등이 나오지 않아서 영광까지 잘 갈 수 있었다.      




영광장이 열리던 자리는 옛 시외버스 타던 곳, 지금 튼실이(우리집 말티즈)가 미용하러 다니는 가게 쪽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엔 영광장이 사납장보다 더 작았던 것 같은데, 실제로 어땠는지는 잘 생각이 안 난다.   

  

리어카를 끌고 장터에 도착하면, 중간 상인들이 벌떼같이 모여들어서 이거 얼마 줄 테니 팔라고 야단이었다. 하지만 파는 것은 늘 할머니가 직접 했다. 단골이 있어서 단골이 아니면 팔지 않으셨던 것 같다.      





영광장의 분위기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다. 채소전과 먹거리장터가 있었다. 우리는 채소를 다 팔고 나면 늘 팥칼국시를 먹으러 갔다. 팥칼국시를 다 먹고 할머니가 시장을 봐오시면 그걸 싣고서 다시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면 오후 4시쯤 됐다. 동생들은 늘 청둥(우리 마을 정자)에 나와서 기다렸다. 언제 사셨는지 할머니는 엿이며 과자를 꺼내놓았다. 난 피곤해 죽겄는데 얼마나 좋아들 하는지. 나는 다시는 안 가겠다고 매번 말해놓고서 또 갔다. 시장이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영광장이 너무 멀었던 건 틀림이 없었다.    


 



‘포천장’에는 리어카를 끌고 갈 수가 없었다. 산길을 걸어서만 갈 수 있었다. 청계동을 넘어서 구봉산 좌측으로 난 길로 가는 거였는데, 지금도 옛길이라고 푯말이 설치돼 있는 걸 봤다. 나는 사납장보다 작고 사람들만 북적거리는 포천장이 싫었으나, 할머니가 일 년에 5회 정도 가시는데, 꼭 나를 데리고 가시는 걸 좋아하셨다. 졸졸 잘 따라다니긴 했지만, 포천장에는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이 별로 없어서 늘 국밥이나 한 그릇 먹고 돌아왔다.      


‘염산장’도 포천장과 똑같은 길로 출발을 하지만 너무 멀어서 걸어가기가 짜증이 났던 장터다. 할머니는 염산장에서 마른 새우나 마른 생선 같은 걸 많이 사 오셨다. 그걸로 우리 도시락 반찬도 해주시고 장도 담그셔서 맛나게 먹은 기억이 나곤 한다. 우리가 좀 살아서 그런 것도 사다가 먹곤 했지, 못사는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난 그 먼 곳까지 다니면서 가족들을 위해 고생하셨던 우리 할머니를 존경한다. 지금도 할머니가 무지하게 보고 싶다. 우리 할머니 생각만 하면 눈시울이 이상해진다. 난 할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은 손자임에 틀림이 없다.     


지금은 장터에 나가도 사람 사는 냄새가 나질 않는다. 그때는 장에 가면 할아버지들을 자주 만났다. 우리 할머니는 그분들에게 꼭 인사를 하라고 시키셨다. 그러면은 약주가 거나하게 취하신 할아버지들이 우리 종손이라고 하시면서 돈도 주시고 과자도 사주셨다. 간혹 너 뭐 사고 싶은 게 있냐고 물어보시면서 신발 가게에 데려가 운동화도 사주시곤 했다.     





‘함평장’에서는 그다지 생각나는 게 없다. 고등학생 시절에 한 학년 위였던 선배의 어머님이 소전(큰 소 파는 곳) 옆에서 국밥집을 하셨는데, 한 달에 한 번 정도 장날에 선배와 함께 국밥 먹으러 가곤 했다.     


역시 ‘사납장’ 날이 좋았던 것 같다. 장 보면서 물건을 산 후에는 다 함께 집으로 향했는데, 쉴 때도 늘 함께 쉬었다. 아이들이 청둥에서 놀다가도 장에 갔다 오는 어머니나 할머니를 보면은 모두 다 뛰어서 마중을 나왔던 그 시절이 지금도 그립다. 다시는 그 시절이 안 오겠지만, 그 시절을 생각나게 해준 내 딸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한다.     


주말 잘 쉬어라. 끝.           





문헌에 의하면 1770년대부터 이전부터 열렸다는 사납장은 이제 없다종용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사납장 모습을 상상해 본다장터 입구에서는 원숭이가 묘기를 부리며 어린애들의 정신을 쏙 빼놓고장터 저 구석에서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아저씨할아버지들이 국밥을 들이켠다누구는 팔고누구는 사고누구는 자리를 지키고누구는 흥정한다사라져버린 장터는 그렇다 치고장터를 채우던 호기심기대설렘활기 같은 건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 Behind     

신광장은 왜 이름이 사납장이에요?

이름이 너무 특이한데요?

몰라,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어.

그 뜻을 알려고 노력해도 아직도 모르겠어.

정확한 위치는 어디였어요?

현재의 신광면사무소 일대야.

엄청 컸었어. 지금은 논이 되고 밭이 됐지만.   

  

국밥집들은 장날에만 장사하는 거였어요?

그렇지. 장날에만.

다 똑같은 국밥을 팔았어요? 

아니지, 돼지국밥 하는 집, 소머리 국밥 하는 집 다 달랐지.

근데 우리는 소머리 국밥 찾아다녔어. 

그게 훨씬 맛있거든.

나중에 우리도 사다 먹을까? 소머리.

그래요~     


사납장이 더 컸는데 

왜 증조할머니는 영광장에서 얼갈이를 팔았어요?

멀고 힘든데.

영광장에 가면 한 무더기에 250원 받을 걸,

사납장에 가면 한 무더기에 50원밖에 안 줘.

그리고 영광장에서가 판로가 더 좋았어.     

꼭 리어카를 끌고 가야만 했어요?

버스도 많고 트럭도 많이 지나다녔지만,

그걸 리어카로 끌고 가지 않으면

짐 값을 또 따로 내야 되잖아.

그 짐 값 다 내고 나면 얼마가 남겠냐?     

다들 그렇게 영광장으로 물건 팔러 다녔어요?

무송에서는 세 집 정도 같이 갔었고,

연화동에서도 꽤 갔었고. 

청계동에서는 별로 안 갔어.     


포천장은 왜 이름이 포천장이에요?

동네 이름이에요?

지명이야. 지금으로 말할 것 같으면 군남면장인데

그 당시 동네 이름이 포천이었지.     

염산장은 영광 염산면이죠?

너 염산장 가봤잖아.

제가요? 

설도항 염산에

나랑 너희 엄마랑 너랑 셋이 같이 갔잖아.

예? 제가 가봤다고요? 거길? (기억이 안 남)      


바닷가여서 파는 물건이 좀 달랐겠네요?

달랐지.

거기는 새우 말린 것도 있고.

홍어도 참홍어가 있고 그랬지.

근데 사납장에 훨씬 맛있는 홍어가 많았어.     

사납장은 언제부터 없어졌을까요?

되게 빨리 없어졌어.

나 고등학교 때도 있었는데,

군대 갔다 오니까 없어졌더라.

포천장도 없어졌고.

염산장은 아직도 째까씩 열린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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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교동 #대룡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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