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인터뷰 13차__Q. 그 시절 학교생활은 어땠어요?
종용, 영숙이 살아온 시절에 비할 만하겠냐마는, 나도 제법 고릿적 시절에 학교를 다녔다. 그땐 이 주일에 한 번쯤 책걸상을 뒤로 쭉 밀어내고 교실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왁스 칠을 했다. 그건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에게 주어진 가장 체계적인 일거리였다. 미화 반장이 깡통에 든 왁스를 주걱으로 퍼서 바닥에 철퍼덕 던지면 나는 영숙이 만들어준 마루 걸레로 바닥을 박박 문질렀다. 손바닥에 잔가시가 박히지 않길 간절히 빌면서.
Q. 아빠, 학교생활 어땠는지 얘기해주세요.
국민학교 시절 등교 시각은 8시까지였습니다. 겨울에는 8시 반까지 가기도 했지요. 등교하면 봄에는 퇴비 증산하러 뒷산에 가서 풀을 베어 왔고, 늦은 봄부터 늦은 여름까지는 제초 작업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공부는 오전에 다 끝내고 오후에는 작업하는 게 우리들의 일과였죠. 1회 입학생이라서 그렇게 하는 게 학교생활인 줄로만 알았고 불평불만은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학교에 모든 일거리는 학생들이 도맡았습니다. 누구 하나 게으름 부릴 수 없었습니다. 겨울이 돌아오면 그놈의 칸나를 전부 캐 가지고 학교 뒷산에 가서 땅을 파고 칸나를 묻었지요. 겨울 땔감은 학교 뒷산에서 해오던지 오후에는 각자 자기 마을 쪽으로 가서 해왔습니다.
땔감을 학교 뒤 처마 밑에 넣어놔야 일과가 끝났습니다. 땔감 마련하기는 눈이 내리기 전까지 계속됐죠. 겨울에 오전 수업을 할 적에는 화목 난로 옆에 앉으려다가 선생님한테 얻어터지기 일쑤였습니다. 화목 난로 옆자리는 여학생들 차지였으니까요.
변소 이야기를 해볼까요. 변소는 푸세식이었습니다. 봄, 여름, 가을에는 청소하기가 그나마 나았지만, 겨울에는 청소하기가 상당히 곤란했습니다. 대변볼 때 정조준을 하지 못해서 옆에다가 배설하는 학생들이 많았거든요. 겨울에는 똥 덩어리가 얼어서 청소를 하려면 물을 데워야 해서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겨울에는 변소 청소 담당이 매 시간마다 청소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똥 덩어리가 꽁꽁 얼기 전에 치운 것이지요.
우리가 5학년이 됐을 때쯤에는 저학년들이 똥통에 자주 빠졌습니다. 5학년 말쯤에는 교감 선생님이 변소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셔서 더욱더 화장실에 가기 싫었습니다. 그래도 고학년들은 졸업할 때까지 화장실을 청소했습니다. 저학년들은 무서워하고 똥통에 자주 빠지니까요.
중학교 시절에도 우리는 1회 입학생이라서 각 반이 돌아가며 변소를 청소했습니다. 그런데 물이 잘 나오지를 않아서 학교 뒷산에 있는 개울에서 물을 길어다가 청소를 했습니다. 여름이면 점심시간에는 뒷산 개골(개울)에 가서 등목이나 목욕을 했습니다. 먹는 물은 더 위쪽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에 늘 주전자에 담아다가 교실에서 마셨습니다.
2학년 때는 전학 온 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주전자에 물을 떠다가 가져다 놓으면 맨날 그걸 창가로 가지고 가서 얼굴에 쏟아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지 말라고 몇 번 주의를 주었는데 멈추지를 않더군요.
우리보다 국민학교 선배라서 어찌할 수가 없기에 먼저 선생님한테 말씀을 드렸지요. 그런데도 또 똑같은 행동을 하지 않겠습니까? “일대일로 싸움해서 네가 지면 그런 짓 다시는 하지 말고, 직접 주전자를 사 와서 물 떠다가 하든지 해라!”라고 말을 한 뒤에 내가 한 방에 날려버렸습니다.
다음날부터는 그 행동을 안 하더군요. 스스로 뒷산 개골에 가서 물을 떠다가 창가로 가서 얼굴에 물을 붓더군요. 이유를 물어본즉 자기는 얼굴에 습기가 없으면 얼굴에 종기가 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두가 다 이해하고 잘 지냈는데, 그이가 학교를 졸업하고 행정학 박사 학위를 딴 후 원인 모를 병으로 고생하다가 하늘나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중학교 때는 일은 별로 안 했지만 물이 부족했습니다. 다행히 학교 뒷산에 도랑물이 좋아서 음용수로 마시고 여름에는 목욕탕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3학년이 되자 학교에는 우리가 심은 벚꽃이 만발했습니다. 참 예뻤지요. 아쉽게도 국민학교, 중학교 때는 재미있게 놀았던 일이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중학교 동창 모임을 하면, 아직도 우리는 맨날 노동력을 착취당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고등학교는 농고로 다니다 보니 농사일의 연속이었습니다. 공부하지 않는 시간에는 실습한다고 나가서 농사일과 퇴비 증산을 했습니다. 2학년 때부터는 농장 실습생이라는 명목으로 농장에 가서 일꾼처럼 일만 했지요. 학교에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얼굴만 보이면 학교생활을 다 한 것으로 쳐주었습니다. 농고는 그때에는 ‘일꾼 양성소’라고도 했습니다.
물론 좋은 점도 아주 많았습니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행군(소풍)을 나가는데, 학교에서 다 알아서 준비를 해주더군요. 중학교 때는 학생들이 직접 준비해서 출발해야 했거든요.
또 실습포도 많았습니다. ‘농과’는 철 따라 과일과 채소를 재배해서 팔았기 때문에 우리(축산과)가 농과생들과 잘 지내면서 얻어먹은 것도 많았습니다. 또 ‘축산과’에서는 우유를 얻어먹었고 돼지 잡는 날에는 돼지고기도 충분히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실습 때문에 죽도록 일은 했지만 농고에 다니는 보람이 있었던 셈이죠.
하교할 때는 수박이나 참외, 토마토 같은 것들을 얻어다가 터미널에 가지고 나가서 여차장 누님들에게 드렸습니다. 차장 누님들은 우리들에게 고구마튀김이나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차비를 탕감해 주셨지요. 차장 누님들에 엄청난 사랑을 받으며 학교생활을 했고 버스비도 아낄 수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학교생활을 이야기하니 고등학교 2학년 때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던 생각이 납니다. 목포에서 배를 타고 8시간을 가야 제주도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아이들이 너무나 멀미를 많이 해서 기진맥진했습니다. 여관에 도착하자마자 전부 다 드러누워 버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도 꼼짝을 못 했습니다. 결국 오전을 여관에서 지내고 점심 식사 후에 출발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겨우 제주시 일대를 여행하는데, 이번에는 아이들이 거의 다 설사병에 걸려서 난리가 났습니다. 차가 여행지도 아닌데 계속 멈췄지요. 변소에 가느라요. 아프지 않은 학생들이 청소를 해주는 시간까지 한 시간씩 지체가 됐습니다.
그런 관계로 제주 여행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만장굴에서는 깊이 들어가지 말라고 했는데도 아이들이 무작정 안으로만 들어가 버려서 인원 찾는다고 예정 시간을 두 시간이나 허비했지요. 선생님들이 너무 화가 나셔서 그 자리에서 총원이 기합 받고 난리도 아니었답니다.
제주에서 2박 3일을 대충 때운 아이들은 다들 쌩쌩하게 목포항에 도착하여 함평까지 잘 왔습니다. 선생님들은 꼴 보기 싫다고 빨리 귀가하라고 하시면서 너희들 같은 놈들은 처음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이상 끝.
종용과 나의 나이 차이가 25년이다. 나도 국민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학교에 푸세식 변기가 있었는데. 참 기가 막힐 노릇이다. 어째서 강산이 2.5회 변할 동안 푸세식 변기는 건재했던 것인가! 내 친구 중에도 변소에 빠진 아이가 있었다. 선생님 두 분이 그 아이의 양쪽 팔을 나눠 잡고 수돗가로 잰걸음을 놓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 모습은 내가 실제로 본 것일까? 너무 재미난 이야기를 들어 직접 본 것으로 착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 Behind
국민학교 때 학교에서 왜 퇴비를 만든 거예요?
아 그거는 화단에 칸나 심을 때 쓰려고.
뒤에 가면 밭이 있는데 거기도 좀 뿌리고.
상추 같은 것들을 심어놨다가
점심때 뜯어서 된장 갖다 놓고
선생님들이랑 같이 밥 먹고 그랬거든.
애들한테 퇴비를 가져오라고 하면
두엄을 가져오잖아. 더러워서 안 돼.
산에 가서 풀 베어서 다져놓으면 퇴비가 돼.
칸나는 왜 뒷산에다 묻은 거예요?
칸나는 겨울이 되면
땅을 파고 묻어놔야지
그대로 놔두면 얼어 죽어버려.
칸나는 뿌리 생물이야.
뿌리를 쪼개면 4개도 되고, 5개도 되고 그래.
그래서 죽지 말라고 땅에 심은 다음에
위를 짚으로 덮어서 따뜻하게 해주는 거야.
늦봄 정도 되면 싹이 나와.
아빠가 우리 집에도 좀 심어주시면 안 돼요?
야. 그게 지고 나면 을매나 더러운지
치우려면 성질나고 돌아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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