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인터뷰 12차__Q. 학창 시절 가장 크게 친 사고는?
요즘 아이들에게 가장 크게 친 사고가 무엇인지 물어봤다가는 별안간 두 눈이 앞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감당 못할 이야기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옛날, 그 시절을 살아온 종용에게 학창 시절 사고 친 이야기를 꼭 묻고 싶었다. 귀여운 거짓말이나 선을 넘은 장난, 오래도록 뒷발차기 했을지 모를 실수가 숨어 있을까 해서.
Q. 아빠, 학창 시절에 사고 친 얘기 좀 해주세요.
나 김종용은 사고도 많이 치고 한 달에 한 10회 정도로 싸움을 할 만큼 맨날 말썽만 피우면서 살아왔다. 초등학교 때는 하교 시에 청계동 사는 형제와 싸움을 많이 했다. 늘 니가 세니, 내가 세니 하다가 싸움이 났고, 한 쪽이 코피가 나면 싸움이 끝났다. 십 분 정도밖에 안 걸렸다.
수박, 참외, 복숭아 서리도 기본이었다. 늘 나중에 걸려서 학교에서 선생님한테 얻어터지고 기합을 받았다. 어머니나 할머니가 오셔서 주인하고 잘 합의하면 다시 집에 가서 어머니한테 부지깽이나 작대기로 얻어터졌다. 그래도 기물 파손 같은 것은 안 했다. 오히려 학교에서 기물 파손하는 애들이 있으면 나에게 많이 혼났다.
우리는 기물 파손 즉시 다른 걸로 교체하는 신속함이 있었다. 학교에서 축구하다가 유리창을 깨면 즉시 학교 소사에게 가서 사정하여 원상 복구하는 영민함도 있었다. 그러면 나중에야 선생님 귀에 이야기가 들어갔다. 선생님이 솔직하게 고하라고 하면 보통 내가 일어서서 말씀드리고 머리통 한 대 얻어맞고 끝나곤 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글자를 잘 몰라서 애들하고 잘 어울리지 못했고, 누구든 기분 나쁘게 하면 뒤지게 패버리는 성격으로 변해 버리는 바람에 나도 내 모습에 놀랐다.
글자를 배운 2학년 때는 친구들과 잘 어울리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런데 하루는 나에게 한글을 가르쳐준 친구가 다른 반 친구들에게 얼마나 얻어터졌는지 얼굴이 멍이 들고 입속이 터져서 엄청나게 부어있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내 친구를 때린 놈들을 하나하나씩 찾아서 혼내주기로 하고, 하교 시간에 신광내천가로 데려가 몇 놈을 패주었는데, 그중 한 아이가 이가 부러져서 학교엘 나오지 않았다.
하루는 선생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너 깡패야?” 하시면서 얼마나 패던지. 선생님한테 맞다가 잠시 소강상태일 때 내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하나도 빼먹지 않고 말씀드렸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선생님이 이야기를 듣고서 집에 가서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셨다. 아버지가 안 계시면 어머니라도 모셔오라셨다. 그러겠다고 하고서 집에 갔더니 아버지가 나를 부르는 게 아닌가!
무서워서 도망가려다가 머리방으로 들어가서 인사를 드리고 아무 말을 안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내 얼굴을 가만히 보시더니만, “너, 누구하고 싸움했냐?”면서 큰소리로 다그치시기에 내 친구가 한글을 가르쳐 준 일, 다른 반 아이들이 내 친구를 때린 일, 그래서 내가 그 애들을 때려준 일, 그 중 한 놈이 이빨 빠진 일, 선생님께 맞은 일을 말씀드렸다.
잠자코 듣던 아버지가 직접 학교에 가겠다고 하셨다. 깜짝 놀라서 안 오셔도 된다고. 그동안 이런 일은 어머니나 할머니가 해결해주셨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도 굳이 내일은 본인이 가겠다는 것이다. 은근히 기분이 좋은데 걱정이 앞섰다. 단 한 번도 학교에 와보지 않은 아버지가 오신다니.
다음날 나는 학교에서 은근히 기다렸지만,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나기에 안 오신 줄로 알았다. 점심 먹고 운동장에 놀러 나가려는데 담임 선생님이 부르셨다. 단단히 얻어터질 각오를 하고 교무실로 갔다. 선생님이 자리에 앉으라더니 네 아버지가 김재경 씨인 줄 이제야 알았다고. 앞으로는 싸움하지 말고 학교생활 잘하라고. 그만 나가보라는 게 아닌가.
어리벙벙했다. 통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하루 종일 기분이 이상해서 하교하고 머리방에 가봤는데 아버지는 안 계셨다. 그새 가신 것이다. 고맙기도 했다. 그다음부터는 선생님한테 맞아본 기억이 없다.
고등학교 2학년 때도 일이 한 번 터졌다. 신광면 동정리라는 곳에 신광서국민학교가 있었다. 신광서국민학교는 신광북국민학교보다 빨리 개교했기 때문에 학생 수도 우리보다 반 이상 더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학생들의 요청으로 신광서국민학교에서 리 대항 배구 시합을 열기로 했다. 신광면을 4개 리로 구분하여 학생들만 시합하기로 하고 추석날 오전 10시에 집합했다.
첫 번째 시합으로 함정리와 동정리가 붙었다. 3전 2승으로 함정리가 이겼다. 다음은 삼덕리와 가덕리가 붙었다. 여기서는 삼덕리가 이겨서 함정리와 삼덕리가 결승에서 시합하게 됐다. 첫 세트는 함정리가 이겼고 두 번째 세트를 이어가던 도중 이미 첫판에서 진 동정리의 한 놈이 살살 시비를 걸어왔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니 함정리가 부정 선수를 데려왔다는 거다.
그게 누구냐고 물어도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부정 선수가 있다고만 우겨댔다. 삼덕리에 사는 내 친구 놈이 그놈 옆으로 가서 “야, 임마! 헛소리 말고 경기장에서 나가!”라고 소리치니, 그 놈이 삼덕리 내 친구의 싸대기를 올려붙이는 게 아닌가! 그대로 집단 패싸움이 일어나 동정리 놈들을 좀 패주었다. 하지만, 그날 전부 화해하며 잘 마무리하고 각자 집으로 왔다.
헌데, 다음 날에 문제가 터져 버렸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애들을 각목으로 때리고 도망갔다는 얘기가 들려온 것이다. 경찰서에 신고가 들어가 우리들을 잡으러 오는 바람에 옆집 종관이 형님네 할아버지 집 토굴에 숨어있었다. 잡혀가지는 않았지만 그 사건이 목포 검찰청으로까지 넘어가 버렸다. 결국 우리 큰 누님이 출두해서 벌금을 내고 끝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와전이 되고 오해가 생겨서 그렇게 까지 돼 버렸다. 나중에 엄하게 꾸지람도 들었다. 그건 추억이 아니라 하지 말아야 했을 큰 경험이어서 지금도 생각이 난다.
말죽거리 잔혹사가 영화에나 있는 얘긴 줄 알았더니, 전국 팔도에 다 해당되는 얘기일 수도 있겠다. 왜 다들 몸으로 해결한 걸까. 운동장에 먼지가 많이도 일었겠다. 엉겨서 싸우느라, 혼나서 기합 받느라.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다 같이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시대를 살아내느라 종용도 많이 힘들었겠다.
☎ Behind
그 이가 부러진 친구는
나중에 학교에 나왔어요?
나왔지.
이가 빠져있었겠네요?
빠져 있었지.
헤엑?
근데, 그게 영구치가 빠진 게 아니야.
중학생인데 젖니가 있는 애가 있다고요?
그렇다니까!
흔들리던 이가 맞아서 빠진 거지.
나중에 3학년 되니까 이가 났다고
나한테 와서 보여주기도 했어!
잇몸을 이렇-게 올리고는
“이 새끼야, 니가 때려서 빠져버렸는데 다시 났다!”
하면서 보여줬다니까.
사과는 하셨어요?
사과했지. 미안하다고.
옛날에는 우리 둘이만 화해하면 됐었어.
지금 부모들이었으면 난리가 났겠지.
자기 자식이 그렇게 되면.
근데 옛날 부모님들은 관심이 없었어.
싸움하고 와도 “목숨에 이상 없지?”
그러면 끝이야.
왜 선생님이 할아버지를 만나고 나서
다시는 아빠를 때리지 않았을까요?
선생님이 우리 아버지를 아셨더라고.
젊었을 적에 선생님을
동네 꼬맹이처럼 데리고 다녔대.
근데 선생이 된 거야.
아아.
나중에 한마디 하시더라.
학교 선생이 더 이상 안 때릴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맞고나 다니지 말라고. 멍청하게.
그러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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