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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맏딸 Apr 15. 2022

종용’s answer. 농약 마신 아저씨 구해준 썰

아빠 인터뷰 11차__Q. 학창 시절에 스스로 해낸 가장 뿌듯한 일은?

   


국민학교 6학년 즈음아주 튼튼한 최신 자전거가 한 대 있었다우리 집은 읍내에서 도보 3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었는데어느 날 자전거를 몰고서 퇴근하는 영숙을 마중 나갔다영숙은 H라인 스커트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그래서 짐칸에 옆으로 비스듬히 앉았다나는 한쪽 몸에 힘을 세게 줘서 무게 중심을 맞추고 힘껏 페달을 밟았다자전거는 야트막한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갔고초여름 저녁의 더위는 바람에 씻겨 날아갔다그 정도 에피소드가 내가 생각하는 학창 시절 뿌듯한 일이었다.        

  




Q. 아빠학창 시절 자랑거리 없으세요?  

   




나 김종용은 초등학교 5학년 시절 어느 날에 학교 시간이 끝나고 선생님과 소꼴을 베러 갔다. 선생님이 먼저 같이 가자고 말씀하셨다. 영문은 알 수 없었지만 함께 동네 저수지 둑으로 출발했다. 저수지에 도착한 후에는 아래 논둑에서 선생님 혼자 앉아 소꼴을 베셨다.    



  


옆으로 가서 낫질을 잘하는가 하고 보니 풀 하나 잡고 하나 베고, 또 하나 잡고서 하나 베고, 그러고 있었다. 낫질을 전혀 하지 못하셨다. 잘 하지도 못하시면서 왜 굳이 낫질을 하려고 하시냐고. 손 베인다고 큰일 난다고 하시지 말라고 했다.      


그랬더니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학교만 끝나고 마을로 돌아가면 누구나 낫을 들고 망태기를 메고서 풀 베러 가는 걸 보고, 풀 베는 게 얼마나 힘든지 경험해보고 싶었다.”라고. 우리는 그만 낫을 내려두시고 저희들 하는 거나 보고 계시라고 하면서 여기저기서 소꼴을 베었다.      





그걸 보시던 선생님이 “너희들은 도무지 공부를 할 수가 없는 생활을 하는구나.” 하시면서 아주 안타까워하셨다. “소 꼴 베는 데는 따라갈 자가 없을 정도로 잘한다. 너희들이 이 정도로 잘하니 어른들은 더 잘 하시겠네?”라면서 억지로 칭찬도 해주셨다. 우리는 대답했다. “어른들도 저희들보다 속도가 늦습니다.”라고.   

   

선생님은 우리가 고생을 이렇게나 많이 하는지 몰랐다고 하면서 계속 칭찬 아닌 칭찬을 해주셨다. 그 선생님이 우리 마을에서 총각으로 혼자 사셨던 김재풍 선생님이셨다. 지금도 가끔씩 생각나곤 한다. 너무나 우리들에게 잘 해주셨던 선생님이셨다.     





아무튼 소꼴을 다 벤 다음에는 소꼴을 망태기에 담아서 집으로 지고 와야 해서 엄청 힘들었다. 문제는 늘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집에 온다고 끝이 아니다. 멍석에 말리던 곡식들을 가마니에 담아놔야 한다. 그다음에는 집 청소도 하고 저녁밥까지 해놓아야 해서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열심히 해야만 그날 하루 일을 다 끝낼 수 있었다. 그래야만 할머니와 어머니께 잘했다는 칭찬을 들을 수가 있었다. 정말 힘들게 살아온 어린 시절이었다.     





중학교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그날따라 자전거를 타고 늦게 집으로 하교하고 있었는데, 길가에 어떤 어르신이 드러누워 계신 게 보였다. 그 시절에는 거지도 많고 상이용사들도 많아서 그렇게 드러누워 있다가 학생들이 도와주러 가면 냅다 일어나서는 금품을 갈취하고 자전거를 빼앗아 가는 일이 잦았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겠기에 옆으로 가보니 어르신에게서 이상한 농약 냄새가 나고 있는 게 아닌가? 오던 길을 다시 돌아가 신광 파출소에 신고를 했다. 그 어르신은 병원에서 살아나셨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어르신이 내 친구의 아버지였다. 그날 농약을 사셨는데 술을 드시고 집에 걸어오시다가 목이 말라 농약을 드셨다는 거다. 얼마나 놀랬는지 지금도 생각이 난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차에서 어떤 어르신이 말씀을 안 하시고 이상한 행동을 했다. 옆에 가서 확인하니 내가 중학교 때 도와드렸던 어르신이었다. 약주를 많이 드신 관계로 어디인지 분간을 못하고 계셨다. 차장한테 이야기를 해서 연화동에 도착한 후에 내가 함께 내렸는데, 또 입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게 아닌가?     

 

그 어르신의 가족이 오시기에 입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말씀드리니, 또 농약 냄새라며 바로 택시를 불러서 영광으로 가는 걸 보고서야 집으로 왔다. 그 어르신은 일주일가량 영광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그것 말고는 뿌듯한 일이라곤 별로 생각나는 게 없다. 난 집에서 완전히 일꾼이었다. 나에게 일밖에는 개인 생활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학생들은 거의 다 그랬다. 고등학생이 되자 학교에서도 일하고 집에서도 일하고. 일일일일. 아, 난 미치기 일보 직전에 자진해서 군대에 갔다.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상 끝.     



어린 종용에게 은 어깨에 짊어진 멍에요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으면서한편으로는 뿌듯한 영역에도 속하는 것이었나 보다하나의 사건을 하나의 감정으로만 정리할 수 없듯이종용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언제나 씁쓸하다가도 달큰하고매콤하다가도 새콤하다어쨌거나 농약으로 큰일을 당할 뻔한 친구의 아버지를 두 번이나 구해드렸으니그건 정말 크게 뿌듯해야 할 일 아닌가?



               

   


☎ Behind     


김재풍 선생님은 담임 선생님이셨어요?

어, 5학년 2학기 때 오셨어.

김대수 선생님이 우리를 너무 괴롭혀서 

애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는데,

그것 때문에 갑자기 오셨지.

그 후로 1년 반 정도 담임을 했고.

김대수 선생님은 누구예요?

그런 사람 있어. 나중에 얘기해 줄게.

일제강점기 때 고등학교만 나오고도 

학교 선생님을 한 사람이야.

김재풍 선생님은 정식으로 교육 대학을 나오신 분이고.

처음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를 많이 이해해 주셨어.

되게 신경을 많이 써주셨나 봐요? 

김재풍 선생님은 우리 무송마을에서 사셨어.

예? 학교가 연화동(다른 동네)에 있었잖아요.

총각인데 그 당시에 

기숙사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연화동에는 방이 없어서 무송으로 왔지.

방이 어디에 있었는데요?

옆집 종관이 형님네 집 아래채에서 

방 하나를 꽁으로 내줬어.

그래서 우리 소꼴 베러 가면 

같이 가서 소꼴 베고 그랬지.

근데 하도 낫질을 못하시니까, 

그냥 그만하시고 우리가 벤 꼴을 

망태기에다 넣어만 주시면 좋겠다고 했지.

졸업하고 뵌 적은 있어요?

아니, 친구들 모임에서 

선생님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못 찾았어. 

근데 나중에 한 친구가 광주광역시에서 뵌 적이 있었대.

돌아가셨다는 얘기도 있고,

지금 살아계시면 벌써 90세 정도 되셨을 걸.     

그렇겠군요.





그 농약 드신 어르신은 뭐 하는 분이셨기에

맨날 술을 자셨대요?

우리 아버지보다 연세가 많으신 분인데

술을 너무 좋아하셔서

장날이면 신광장에 가서 술을 드신 거야.

농약을 드시고도 큰일이 안 났네요?

제초제였으면 죽었지.

저독성 농약이어서 살았던 거지.

그 아저씨가 고맙다는 말씀은 해주셨어요?

퇴원하고 이틀 후엔가 만났어.

차에서 내리니까 내 손을 잡고 고맙다고 하시면서 

2천 원을 주시더라?

그때 2천 원이면 2만 원쯤 되나요?

그래그래.

그래서 2천 원을 가지고 가게에 가서 

활명수를 한 박스를 사면은 250원이야.

그리고 750원으로는 과자 사고.

책가방 속에 다 쑤셔 넣어가지고

집에 가서 동생들 다 줬지.

나머지 천원은 내가 갖고 다니면서 맛있는 거 사 묵었어.           

착한 일 할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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