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인터뷰 10차__Q. 어린 시절에 살던 집을 소개해 주세요.
나는 종용이 어린 시절을 보낸 옛집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30여 년 전, 그 집을 리모델링할 때 내가 이미 초등학교 2학년이었기 때문이다. 그 집은 완전히 한국식이었고 구조가 복잡했기 때문에, 어린 나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신기한 놀이터나 다름이 없었다.
내가 그 옛집에서 가장 좋아했던 장소는 마루와 작은방, 그리고 그 둘을 잇는 찬광이었다. 기다란 마루를 다다다다 뛰어가서 쪽문을 열고, 비밀의 공간 같은 찬광을 통과해 작은방에 펴져 있는 따뜻한 이불속으로 쏙 들어가는 일련의 과정이 너무 재미있었다.
나는 내가 아는 그 집에서 종용이 어떻게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궁금했다. 종용에게 물었고, 종용은 평소의 두 배 길이의 답변을 보내왔다. 아마, 그 집에서 살아봤거나 시간을 보내봤던 사람이라면 모두 종용만큼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그 집이 그런 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Q. 아빠, 어린 시절에 어떤 집에 살았어요?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무송마을의 이 집은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에 지어졌답니다. 나는 이 집에서 군입대 전까지 아무 불편 없이 살아왔습니다. 30년 전에는 리모델링해서 지금의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평면도는 리모델링하기 전까지의 옛집의 모습입니다.
내가 태어난 연도가 1958년도이니 그때에는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입니다. 우리 집은 남자가 귀한 집으로, 우리 아버지도 외아들이시고 나 역시 종손으로 태어나 귀염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머리방이라는 곳은 아무도 함부로 드나들지 못한 할아버지만의 방이었으나 나만은 언제나 들어가서 놀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머리방 벽장에 있던 모든 맛난 것을 내어 주셨습니다. 나는 생각이 나지 않는 시절이지마는 막내 고모님께서 그 일을 자주 말씀해주시곤 하셨습니다. 머리방은 미닫이문으로 두 개의 방으로 나뉘었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는 어머님이 늘 머리방에서 베를 짜곤 하셨고, 손님이 오시면 주무시는 손님방으로 내어드리기도 하였답니다.
안방에서는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우리 형제들까지, 총원 7명이 함께 자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익룡이가 서울로 간 뒤에는 늘 6명이 함께 잤고 가끔씩 큰고모님이나 막내 고모님이 함께 주무실 때도 있었습니다.
부엌 살림살이는 어머니가 다 하셨지만,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저녁밥은 내가 하고 설거지와 부엌 청소, 마루 청소까지 내 담당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밭일이 먼저였기 때문에 일하고 집에 돌아오시면 밥 먹고 바로 씻고 잠자기에 바쁘셨습니다. 그러니 청소와는 거리가 멀었지요.
그래서 내가 소 풀 베고 소 풀 띠기고, 집에 와서 부엌 청소하고 물 길어다가 설거지하고 밥하고, 밥 다 되었으면 마당 쓸고 걸레 빨아다가 마루 닦고, 그러고 나면 나도 힘들어서 안방에 가서 잠깐 드러누워 있겠다는 게 잠에 취해서 저녁도 못 먹고 잠만 잤지요. 아침에 일어나면 어머니가 해준 밀가루 개떡 하나 먹고 바로 학교로 달려갔습니다.
오후에 집에 오면 부엌에 가서 청소하고 보리쌀 씻어서 1차로 끓여 놓고서 소를 끌고 밖으로 나와 소 풀 베고 소 풀 띠기고, 다시 집으로 가서 보리 삶은 거 건져서 일부는 대나무 소쿠리에 넣어놓고 나머지는 밥하고, 그다음에 돼지밥 주고 개밥 주고 마당과 마루를 청소했습니다.
일 나간 할머니와 어머니 기다리다가 오시면 밥 차려서 함께 안방에서 먹고 잠자고 내일 또 학교에 가고. 그게 일상인 생활이었답니다. 그러니 나에게는 부엌이 지겹도록 들어가기 싫은 장소였습니다.
마루는 참 좋은 곳이었지만 청소하기가 너무나 힘들어서 짜증도 많이 나곤 하였지요. 마루 밑 청소는 1년에 3-4회 정도 하였는데 얼마나 더럽고 먼지가 많았는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연장 잃어버린 걸 전부 마루 밑에서 찾아 곳간에 도로 갖다 두는데 또 없어져서 찾아보면 마루 밑에 있곤 하였지요.
한번은 닭이 없어져서 찾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마루 밑에 들어가서 알을 품고 있는 것을 찾은 적도 있답니다. 닭새끼가 얼마나 지저분한지 잘 모르시지요? 마루 쪽에는 못 오게 하지만, 언제 올라왔는지 똥을 꼭 마루에 와서 찍 싸고 도망가 버립니다. 닭똥 치우기가 너무나 싫어서 닭을 몰아내기 위해 쪼그만 돌을 가지고 있다가 마루 가까이 오면 던졌는데, 하필 닭대가리에 맞아서 죽기도 하였답니다. 그런 날 저녁에는 여지없이 닭고기가 상에 올라오곤 하였지요.
동생 권용이가 가끔 마루에 똥을 쌌는데 개를 부르면 즉시 마루에 올라와서는 똥을 다 묵어버리고 마루에서 내려가 버리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아무도 개를 싫어하지 않았어요. 이랬든 저랬든 마루가 좋은 때는 여름이었습니다. 언제든지 놀기도 하고 잠도 자고. 오후쯤 머리방 쪽에 있는 마루에 있으면 너무 시원하고 좋았답니다.
안방 뒤쪽 울목에는 겨울이면 늘 고구마를 보관하곤 했지요. 점심은 언제나 고구마를 쪄서 김장김치와 함께 먹곤 했습니다. 그리고 심심할 때는 생고구마를 한두 개씩 깎아서 먹으면 얼마나 맛났는지 모른답니다.
광에는 주로 곡식을 보관했습니다. 할머니가 열쇠로 잠가 두고 광을 관리하셨지요. 광에는 맛난 것이 보관되어 있어서 어떻게든 들어가서 찾아보고 싶었지만, 열쇠가 없으니 참으로 궁금하기만 하고 어쩔 수가 없었답니다.
다만, 명절 때나 제사 때는 관리가 소홀해서 광에 들어가 맛난 것을 찾아 먹는 바람에 할머니나 어머니한테 야단도 많이 들었습니다. 제사나 명절 때 떡이나 한과나 과일 같은 음식들은 제사나 차례를 지낸 다음에 먹어야 한다는 교육도 철저히 받았지만, 어려서 참지 못하고 많이 훔쳐 먹었죠.
일꾼 방에서는 일꾼 두 분이 주무셨는데, 한 번씩 일꾼들과 함께 자고 나면 너무 가려워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옷을 벗어보면 이가 그렇게 많이 있어서 어머니가 일꾼들 방에서는 자지 말라고 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일꾼들 방은 동네 사랑방이기도 했었습니다. 조금 젊다고 하는 분들은 일꾼 방에 모여서 잡담도 하고 늘 함께하셨지요.
일꾼 방문 앞에는 떡방아 찧는 곳이었어요. 석물 절구통이 있었지요. 벼를 넣고 찧어서 쌀로 만들기도 하고, 쌀을 물에 불렸다가 찧어서 쌀가루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쌀과 쌀가루를 얼마나 어렵게 만드는지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다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내 나름대로 밥도 해놓고 청소하고 설거지도 하였던 것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에 대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작은 일꾼과 함께 소 풀을 베러 갔었지요. 어려서 잘 모르고 소꼴 망태기 맨 밑에다가 낫을 놓고서, 소 풀 벤 것을 망태기에 가득 채우고는 등에 지고 집으로 출발했습니다. 집까지는 잘 왔는데 우리 집 대문턱이 너무나 높아서 어린 내가 대문턱을 넘다가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다음 망태기를 풀어놓고 일어났다면 괜찮았을 텐데 망태기를 지고 일어나려다가, 그만 망태기 맨 밑에 걸려있던 낫에 발목을 크게 베이고 만 것입니다.
어머니는 제사 준비를 하다가 내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오셔서 초동 조치로 된장을 발라주셨습니다. 지혈은 되었지만 너무 아파해서 불갑면 소재지에 있던 약국으로 달려갔지요. 약국에서도 해줄 게 없어 병원으로 가라고 했지만, 날이 저물어 일단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시 피가 철철 났고 이번엔 쑥으로 지혈을 했지요. 그 다음날 영광 병원에 입원해서 혈관 접합술을 한 다음 며칠 동안 입원했다가 퇴원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 내 왼쪽 다리는 오른쪽보다 짧아졌습니다. 혈관도 짧게 연결해놓아서 왼쪽 발목 앞에 보이는 혈관을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가 있지요. 이 때문에 군 생활 당시 여러모로 고생했습니다. 왼쪽 군화에는 깔창을 하나 더 넣어서 신거나, 뒤축을 좀 높여서 신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안 하면 다리가 너무 아팠거든요.
대문에서 다친 이야기가 너무 길었네요. 우리 집에서는 소를 키웠습니다. 겨울이면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소 밥통에 물을 끓여서 소를 목욕시키곤 했는데, 소가 목욕하다 말고 꼭 나에게 와서 머리를 핥아버려서 귀찮기도 했지요. 허나 난 우리 집 소를 좋아했고 소 역시 날 좋아해 주었답니다. 서로 믿음이 있었기에 소 등을 탈 수 있었지요.
돼지우리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치워줘야 하는데, 재래종 돼지는 너무 깨끗이 살았기에 똥 싸는 자리만 치우면 되지만, 뉴햄프셔나 두룩저지는 무지하게 더러워서 돼지 막 치우기가 너무나 힘들었던 기억도 납니다.(종용은 언젠가 나와 내 동생에게 뉴햄프셔와 두룩저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왜??)
우리 집 샘은 물이 아주 시원해서 여름에 그물로 목욕을 하면은(그때는 ‘샤워’라는 단어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또 여름에는 김치나 과일을 바가지에 담아서 샘 깊은 곳에 보관했다가 먹었고, 막걸리도 넣어두었고 한창 더울 때는 밥도 샘 속에 넣어서 보관했답니다.
아주 어릴 때는 두레박을 사용해서 샘의 물을 퍼 올렸어요. 나중에는 펌프를 사용했지요. 힘만 주면 되니 간편해서 좋았지만, 두레박에 대한 추억이 종종 떠올랐습니다. 펌프는 꼭 마중물을 넣어야 물을 품어 올릴 수 있는데요. 마중물도 그냥 놔두고 나가버리면 오리와 닭새끼들이 목욕을 해버려서 너무 더러워지니까 공동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다가 마중물로 사용하기도 했답니다.
우리 집 헛간은 용도가 다양했지요. 그때 그 시절에는 막걸리도 담가 먹지 못했어요. 불법으로 만들어 먹다가 발각되면 벌금을 내고 막걸리도 다 빼앗기는 그런 시절이라 ‘밀주’라고 했지요. 막걸리를 만들려면 숙성을 시켜야 하는데 그때 우리 헛간에 저장해 놓았습니다. 면서기들은 검사를 나와도 헛간에는 냄새가 난다고 들어가질 않았거든요. 헛간에서 숙성시킨 막걸리는 조금씩 가져다가 체로 밭쳐서 먹었지요.
한번은 숨바꼭질을 하다가 옆집 형님하고 함께 헛간에 숨었는데, 하필이면 막걸리 숙성 항아리를 발견하지 않았겠습니까? 무심코 나무 대롱으로 빨아먹다가 그 자리에서 잠들어버려 아침에야 깨어나 헛간에서 나왔던 기억도 있답니다.
8회 인터뷰는 이상 끝입니다.
옛집은 비록 그 모습을 잃었지만, 어딘가 다른 차원의 시공간에 아직도 존재해 함께 나이를 먹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수많은 기억을 선명하게 되살릴 수가 있을까? 나는 언젠가 그 자리에 다시 옛집의 모습을 적당히 되살린 한옥을 지어 사는 꿈을 꾼다. 마루에 앉아 비 오고 눈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옥수수도 고구마도 양껏 쪄 먹고 싶다. 종용과 영숙이 오래오래 건강히 살아서 아주아주 옛날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먼 미래에도 계속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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