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인터뷰 9차__Q. 가장 기억에 남는 소풍은?
책도 준비물도 가방에 챙겨 넣을 필요가 없었다. 영숙은 일찍 자라고 했지만, 나는 옷장을 뒤지며 모자나 머리띠, 스타킹 같은 걸 골랐다. 이불을 덮고 누워서 ‘내일 용돈은 얼마나 주실까?’하고 기대하느라 잠 못 들던 밤. 나에게 소풍은 그런 당연한 기다림이었다.
Q. 아빠, 소풍 갔을 때 생긴 일 좀 얘기해 주세요.
국민학교 시절, 모든 봄/가을 소풍을 매번 같은 곳으로 갔다. 봄 소풍은 선들저수지로. 가을 소풍은 불갑사로. 다만, 4학년 때 딱 한 번, 전 학년이 함께 집에서 아주 가까운 구봉산 정상으로 소풍을 갔다. 전 학년이라고 했지만 5-6학년은 없었다. 4학년인 우리가 신광북국민학교 1회 입학생이었기에 1-3학년 동생들과만 함께 간 셈이다.
그때 생각이 생생히 난다. 1학년들을 거의 우리가 업고 올라갔기 때문이다. 그때는 부모님들도 상인들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들끼리 놀고 점심도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문제는 우리들이 1학년들에게 밥도 먹이고, 쉴 때나 게임할 때나 늘 돌봐줘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4학년은 보물찾기도 제대로 못 하고 혹여 보물을 찾는다고 해도 1학년에게 줘야 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구봉산 소풍은 가까워서 좋았지만, 우리 4학년들은 1학년들을 보호하느라 소풍 같지 않은 소풍을 다녀왔다.
봄 소풍으로 간 선들저수지는 지금은 불갑저수지로 바뀌었고, 가을 소풍으로 간 불갑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봄 소풍을 선들저수지로 가게 된 이유는 벚꽃이 아주 좋았기 때문이었지만, 초등학생이 걸어가기에는 너무 멀었다.
저학년들은 조금 걸어가다가 힘들고 다리가 아프다며 난리도 아니었다. 애들이 울고불고하면 함께 가던 부모님들이 소 구루마에 태워서 가기도 했다. 그때는 소 구루마를 끌고 따라오시는 부모님들이 계셨다. 그래서 1학년들은 80프로 정도는 업고 가고, 나머지는 소 구루마타고 가는 게 당연했을 정도였다. (우리들은 1학년 때 한 명도 그러지 않았는데 말이다.)
아예 학교에 오지 않고 부모님과 함께 집에서 출발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불갑사까지 가려면 10km 정도는 걸어야 하는데 그때는 길도 좋지 않았다. 그러니 저학년들은 아버지나 삼촌, 형들이 자전거에 실어서 소풍지까지 태워다 주기도 했다. 그걸 보고도 선생님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간다. 어린 애들이 보통 정신으로는 그 먼 거리를 걸어서 갈 수가 없는 거다.
지금 생각하면 아이들이 부모님의 소 구루마나 자전거에 실려, 선배들의 등에 업혀 소풍 가던 모습도 참 보기 좋았다. 하지만, 소풍을 다녀온 다음날에는 너무 아파서 학교에 오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학생이 반 정도밖에 출석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땐 오전에만 수업하고 오후에는 집에 가기도 했다. 그래도 누구 하나 소풍을 안 가겠다고 하는 학생은 없었다.
초등학교 소풍은 가족 나들이 시간이기도 했다. 소풍날은 신광면 함정리 전체가 함께하는 축제날 같았다. 소풍 가면 제일 좋은 게 김밥이었다. 물론, 각자 가져온 음식을 마을별로 모여서 함께 먹기도 했다. 학부형 노래자랑도 했고, 노래자랑이 끝나면 학생들이 보물찾기를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시간이 촉박하니 또 빨리 출발해서 귀가해야 했다.
3학년 때도 봄 소풍으로 선들저수지에 갔다. 둑 밑에 화려한 벚꽃 아래서 노래를 부르고 장기자랑도 하고 밥도 먹고 보물찾기도 했다. 선생님이 저수지 둑 위로는 위험하다고 올라가지 말라고 했건만, 나와 내 친구들 세 놈은 둑 위로 올라가서 놀았다.
한 놈은 마을 쪽으로 크게 나 있는 수문으로 들어가서 구경하다가 나오지를 못했다. 그 자리에 앉아서 울고만 있던 놈을 내가 들어가서 데리고 나왔다. 그런데 선생님이 그걸 보시는 바람에 우리 세 놈은 뒤지게 얻어터졌다. 다음날 학교에서도 하루 종일 벌을 서다가 변소까지 청소하고 맨 나중에 귀가했다.
6학년 때는 선생님의 제안으로 해발 516M인 불갑산 꼭대기 연실봉에 올라간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여학생을 포함한 6학년 전원이 함께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해불암부터 연실봉까지는 여학생 두 명과 남학생 20명 정도만 함께했다. 내 생전 처음 연실봉에 올라서니 얼마나 좋은지 눈물이 나올 뻔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다음날이 문제였다. 다리통이 얼마나 아픈지 걸음을 뗄 수 없을 만큼이었다. 학교 선생님이 운동장을 뛰어서 돌라고 하셨는데, 시키는 대로 했더니 거짓말 같이 다리통이 아프지 않았다.
신광중학교에 올라왔는데, 1학년 가을 소풍으로 또 불갑사를 간다고 했다. 내가 나서서 선생님한테 “선생님, 우리 신광북국민학교 출신들은 매년 가을마다 소풍을 불갑사로 다녀왔습니다. 다른 데로 좀 가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질문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대뜸 “신광북국민학교 출신들은 이번 소풍은 안 가도 된다.”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난 바로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아닙니다. 저희들도 가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이미 늦었다. 선생님의 “너, 이리 나와!”라는 말과 동시에 몽둥이가 나를 사정없이 강타했다. 가자면 가는 거지 무슨 잔말이 많으냐고 하면서, 이번 불갑산 소풍은 1박 2일로 갈 거니까 쌀을 한 되씩 가져오라고 했다.
“김종용 너, 아직도 소풍을 가기가 싫으냐?”라는 선생님의 물음에 무조건 가겠다고 답하고서 내 자리로 들어왔다. 그랬더니 또 다시 앞으로 나오라는 것이다. 들어가라는 말을 안 했는데 왜 들어가느냐는 물음에, 나는 아무 말이 없으셔서 들어왔다고 대답했다. 대답이 끝나자마자 다시 몽둥이가 나를 강타했다. 어찌나 아프던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불갑사로 또 소풍을 가게 됐다. 1학년이 3반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반 별로 가는 소풍이라서 재미가 있을 법 하겠다고 생각했다. 막상 신광중학교에서 중간 기착지인 용천사까지 도착해 보니 애들이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도시락을 먹고 조금 쉬었다가 다시 불갑사를 찾아가는 데 하늘이 보이지 않는 숲길이었다. 대략 두 시간쯤 걸으니까 불갑산 저수지가 보였다. “다 왔다!”하고 외치니 선생님이 왜 그렇게 길을 잘 아냐고 묻는다. 국민학교 시절 6년 내내 왔다고 다시 말씀드리니, 앞장서서 불갑사까지 인도하라기에 충실히 인도했다.
불갑사에 도착해서 쌀 한 되씩 걷어서 시주하고 쉴 시간도 없이 법당에 가서 부처님께 절을 했다. 스님이 불갑사 약력에 대해 말씀해 주시는데 잠이 쏟아져서 죽을 맛이었다. 스님 말씀이 끝나고 불갑사 밑 또랑에 가서 씻었다. 다시 절에 가서 선생님 말씀을 듣고 저녁 먹으러 갔더니 절밥은 또 얼마나 맛나던지. 주는 거 싹 먹어버리고 공양간에 가서 아주머니께 밥 좀 더 달라고 했다. 그것까지 다 먹어버리니 배가 너무 불러서 아플 지경이었다.
그날 절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학교로 돌아가기 전에 한 번 더 일이 터졌다. 선생님께 ‘신광북초등학교’ 출신들은 여기서 집으로 가는 게 더 가깝다고 했다가, 니들 맘대로 다하라는 말과 함께 아주 신나게 얻어터지고야 만 것이다. 결국 불갑사를 출발해서 오후 늦게야 학교에 도착했다. 또 다시 선생님 말씀을 듣고 집으로 오니 늦은 저녁이었다. 뭔 지랄을 하고 있다가 이제야 오느냐며 어머니에게 빗자루 몽둥이로 또 얻어터졌다.
중학교 2-3학년 때는 인근 저수지로 소풍을 가서 별것도 없었다. 함평농고에서는 소풍이 아니라, 돌머리 해수욕장으로 행군을 다니는 바람에 아무런 추억도 없었다. 맨날 일만 하는 학교였기 때문이다. 이상 끝.
종용의 소풍 얘기에서 나와 공감대가 형성되는 부분은 ‘산’과 ‘김밥’ 뿐이었다. 문제는, 그 무엇을 주제로 삼더라도 종용의 글에는 얻어터지는 장면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 확률이 무려 50%를 넘는다. 나는 묻고 싶다. 그 시절의 부모님과 선생님들에게. 도대체 왜 종용을 뚜드려 패셨나요? 말로 하면 되잖아요. 말로. 우리 집에서는 정말 귀한 아빠라구요!!! 흥.
☎ Behind
불갑저수지 가는 길에
그 옛날에도 벚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어요?
옛날에는 불갑면 소재지에서
불갑사로 들어가는 길에는 지금 같은 벚꽃길이 없었어.
그러면요?
우리 국민학교 때는
불갑저수지 둑 밑에 가야
아름드리 벚꽃나무 열 몇 개가 쫙 있었어.
지금도 있어요?
지금은 없더라고.
불갑저수지를 증축하면서 베어 버렸나 봐.
그 옛날에 학부형 노래자랑은 어떻게 했어요?
노래방 기계 같은 건 없지 않았어요?
학교 소사나 누가
엠프랑 마이크랑 밧데리 큰 거 하나 챙겨서
경운기 뒤에 싣고 갔어.
소풍지에 가서 설치하고
그냥 부르는 거야. 반주도 없이.
무반주로요?
어. 옛날 노래 나오면 따라 부르고 그러니까.
엄청 즐거워했어.
우리는 안 즐거웠는데 어른들은 즐거워했지.
그날 그거 하러 오는 거야. 어른들은.
연실봉은 뭐가 그렇게 좋았어요?
힘들기는 오사게 힘들었는데,
해불암부터 꼭대기까지 진짜 무지하게 힘들거든.
근데, 내가 어려서 높은 산을 처음 올라갔잖아.
저기는 영광이고, 저기는 함평이라고
선생님이 막 가르쳐 줬어.
확 트인 풍경이 어찌나 좋던지.
내 가슴 속에는 그때가 최고였어.
지금도 그런 산이 없지.
그래서 지금도 연실봉을 좋아해.
아빠가 선생님이나 할머니한테
얻어터졌다고 표현하신 건
얼마나 어느 강도로 맞은 거예요?
느그 할머니한테는 짝대기로 서너 대 뚜드려 팼지.
내가 도망가면 못 때리니까
그냥 가만히 뒤로 와서 등짝을 때려버린다니까?
선생님은 나만 때리는 게 아니고,
누가 잘못하면 다 때리는 거야.
책상 위에 올라가서 뒤꿈치도 맞고. 손바닥도 맞고.
선생님 성질이 안 풀리면 싸대기도 막 맞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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