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인터뷰 8차__Q. 가장 기억에 남는 친구는 누구인가요?
어린 시절, 지영이, 수정이, 선미와 어떻게 친해졌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학기 초 교실을 채운 수십 명의 아이 중 책상이 가까이 붙어 있거나 하굣길 동선이 겹쳤기 때문에 슬그머니 친해졌을 것이다. 그 친구들과는 아주 자잘한 추억들을 많이 만들고 나서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나는 이 경로가 모두에게 통용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종용에게는 인상 깊게 다가와 묵직하고 특별한 추억을 남긴 세 명의 친구들이 있었다.
Q. 아빠, 어릴 적에 어떤 친구들이 있었는지 얘기 좀 해주세요.
초등학교 때 만난 친구들은 다 동네 친구들이었습니다. 동네 근처에 있는 조그마한 학교에 다 같이 다녔으니까요. 그 시절에는 그저 뛰어놀기 바빴지요. 여러 번 얘기했듯이, 싸움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싸우고 난 뒤 깨끗이 승복하고 다시 도전하던 그 아이들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실명을 밝힐 수는 없지마는 그래도 그 아이들이 간혹 보고 싶고 함께 만나 쇠주라도 기울이며 옛날 생각을 하고 싶습니다. 그 외에는 뭐가 기억에 남아 있을까요? 잠시 생각 좀 해봐야겠습니다.
아, 어떤 여자아이는 얼마나 사납던지 우리들이 ‘싸납쟁이’라고도 했었답니다. 학교 내에서는 그 여자아이를 당해낼 자가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래도 그 싸납쟁이 여자아이는 꼭 자기보다 더 독한 아이들만 괴롭히고, 약한 아이가 괴롭힘을 당하면 어디선가 나타나 참견을 했습니다. 여자아이들에겐 정의를 지키는 친구였던 거지요. 그러니 지독한 싸움꾼이었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 여자아이가 싫지가 않았습니다.
중학교 입학 후 내 옆자리에 앉았던 친구도 있었습니다. 실명은 밝히지 않고 그냥 ‘내 옆자리 친구’라고 하겠습니다. 나는 중학교 다니면서도 한글을 몰라서 책 읽기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창피하기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지요. 그런데 내 옆자리 친구가 한글을 모르냐고 물어 보드만 즉시 자기가 가르쳐 주겠다고 하지 않겠어요? 학교가 끝나고 자기 집에 가서 두어 시간씩 한글 공부를 하고 가라는 말이었습니다.
내 옆자리 친구를 따라 친구 집에 도착하니, 친구 어머님이 여기서 밥 먹고 잠자고 내일 학교로 바로 가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그런 인자하신 말씀을 생전 처음 들어보았습니다. 우리 어머님은 내 친구가 집에 놀러 오면 “왜 데려오느냐, 바쁜데 쓸데없이 친구나 데려오는 그런 짓은 절대로 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었거든요. 친구 어머님의 말씀에 얼마나 감사한지.
그때부터 그 친구 집에서 두 시간이나 많게는 세 시간까지 한글 공부를 하며, 중학교 2학년 때 한글을 완벽히 습득했습니다. 그 친구가 아니었으면 나는 지금 어찌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끔찍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 친구를 찾으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아무도 모른다는 말만 나오는 중이랍니다. 내 인생이 아주 빛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너무나 좋은 친구들이 있었기에 성실히 살아올 수 있었다고 자부합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아주 특별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의 성도 이름도 모르지만, 별명은 ‘아메리카 친구’였습니다. 왜 ‘아메리카’였냐면, 완전 하얀 얼굴에 백색의 머리카락에 생긴 것 또한 서양인 같았거든요. 이 친구 집에 가면 가족들은 모두 전형적인 동양인으로 한국인 같은 모습이었는데, 오직 이 친구만 그렇게 생겼습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이 친구는 늘 혼자였습니다. 나하고 만난 뒤부터는 내가 늘 함께했지요. 다른 친구들의 놀림도 막아주면서 친하게 됐습니다. 학교생활은 늘 재미가 없었지만, 그 친구에 바른 심성이 좋았던 나는 더욱더 그 친구를 좋아하게 됐습니다. 2학년에 올라가면서 알게 된 사실은 윗대에 할머님 한 분이 서양인이셨다더군요. 그래서 그 친구의 생김새가 서양인 같았던 거지요.
2학년 때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간다고 하니까, 이 친구가 나보고 같이 가자고 졸라댔습니다. 나는 집에 가서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다녀올 테니 돈을 달라고 했다가 어머니에게 불쏘시개로 엄청나게 얻어터졌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할머니를 졸라서 허락을 받았지요. 다행히 이 백색 친구와 함께 제주도까지 수학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때 찍었던 그 많은 사진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르겠네요.
친구의 어머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함께하면서 친하게 지내라고 하셨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해병대에 입대하는 바람에 헤어지게 됐습니다. 어디에서 사는지 꼭 찾아보고 싶지만 이제는 찾을 수가 없게 됐지요. 고등학교 시절에 자기는 꼭 미국에 가서 살겠다고 말했으니, 혹여 미국에서 잘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저 어느 하늘 아래에서든 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이상하게도 친구를 사귀는 게 어려워서 혼자일 때가 많았습니다. 강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라서 그런지 유독 약한 아이들과 친했던 것 같습니다. 몇몇 친구들과는 친하게 지냈지만, 학창 시절의 친구들과는 특별히 인연이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군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지 군 생활 시 친해진 이들이 더 많습니다. 그들과는 늘 함께하고 싶고 늘 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다만, 중학교 때 나에게 한글을 깨우쳐준 ‘내 옆자리 친구’와 고등학교 시절 백색 외모를 가졌던 ‘아메리카 친구’는 어디에 살더라도 건강과 행복이 넘치고 가정이 화목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종용의 현실감 있는 친구 이야기를 듣고 무서워져 버렸다. 혹시 나에게도 고마움을 표하거나 회포를 풀어야 할 친구가 분명히 있는데, 기억력이 나빠서 떠올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잊고 있던 중요한 기억이 갑자기 떠오른다고 해도 친구들과 나 사이의 관계가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도 종용처럼 그 친구들이 어디에 살더라도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라는 채로 시간은 흐를 테니까.
☎ Behind
그 싸납쟁이 여자아이는 잘 싸운다는 소문만 들으신 거예요?
진짜로 싸우는 걸 보셨어요?
아니, 나하고 싸웠다니까!
나하고 무지하게 싸웠다니까. 그 가시나.
원래는 우리 학년이 아니야.
나이가 우리보다 많거든.
근데 옛날에는 학교가 없으니까
여자애들은 학교를 안 보내다가,
근처에 신광북국민학교가 생기고 나서
나이 따질 거 없이 다 1학년으로 보내버린 거야.
그래서 나보다 훨씬 나이 많은데,
나랑 맨날 싸웠지.
어떻게 싸웠는데요?
말로 싸웠지 말로.
그리고 손톱으로 할퀴어버리고 막.
날 뚜드려 패고 막. 와서 찍어버리고.
보통이 아니었다니까. 보통이 아니었어.
아빠가 뭘 잘못했겠죠.
난 잘못한 것도 없었는데.
진짜야.
(음...)
한글을 가르쳐 준 옆자리 친구는 착한 친구인데
왜 실명을 공개하지 않으시는 거예요?
이름이 심관O인데,
정확히는 모르겠어.
그리고 여기에 이제 안 살아.
공부도 전교 10등 안에 들 정도로 잘했는데,
마음이 온전한 애는 아니었어.
학교 다닐 때도 손목을 그어서 죽으려고 했었거든.
내가 왜 그러냐고 막 화를 내고 그랬지.
그 후에 광주로 고등학교에 간다면서 연락이 끊기고,
식구 전체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데
광주로도 안 갔다나 봐.
그 후로는 동창들이 다 찾으려고 노력했는데
못 찾았어.
(음...)
아메리카 친구는 알비노 증후군이 아니라,
정말 서양인처럼 생겼다는 거예요?
완전 서양인이야.
얼굴도 하얗고, 머리도 완전히 하얘서.
어느 정도였냐면
미국에서 한두 달 정도
우리 영어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 왔었거든.
아메리카 친구가 농구를 하고 있으니까
가서 영어로 막 말을 건 거야.
근데 아메리카 친구는 아무 말도 못 알아들었지.
한국 사람이니까.
그 정도로 서양인같이 생겼어.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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