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인터뷰 20차__Q. 결혼 준비와 결혼식 이야기를 해주세요.
종용의 유년 시절 이야기는 국영방송 시대극을 보는 것 같은 재미가 있었다. 유년 시절 이야기를 조금 더 묻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그렇듯, 세월이 그렇듯, 우리의 인터뷰는 강물이 흐르듯 나아가야 했다. 그렇게 종용과 영숙의 결혼식 이야기에 다다랐다. 이는 앞으로 수많은 갈등과 불화의 이야기가 줄을 이을 거라는 무시무시한 예고와도 같다.
Q. 아빠, 어떻게 결혼을 결심하게 됐는지, 결혼식은 어떻게 치렀는지 얘기해 주세요.
우리 시골집 뒷산 너머에 나의 초등학교 2년 후배였던 아가씨가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쌍둥이 중 동생이었고 전형적인 소작농이어서 농사로 벌어서 묵고 사는 그런 집안이었다. 그 집 둘째 딸내미이자 내 2년 후배였던 아가씨와 혼담이 오갔다. 하지만, 나는 군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모르고 있었다.
휴가를 받아 시골집에 갔더니 나에게 할머니와 어머니가 혼담에 대해 물어왔다. 나는 싫다고 분명히 말씀드리고 군으로 귀대했다. 그 후에 우리 할머니가 그 집에 가서 혼담이 깨진 이유를 둘러댔다고 한다. 내가 그 아가씨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집의 위치를 보아하니 우리 집이 그 집의 발밑에서 자는 형상이라고 하여 혼사 문제가 없었던 일로 됐단다.
지금 나하고 사는 황 여사는 1982년 10월 25일에 제주도 누이의 중매로 처음 만났다. 누이네 빵집 안방에서 상견례를 하고 둘이서 택시를 타고 서귀포에 있는 허니문 하우스로 이동했다. 그때가 대략 오후 4시 정도였을 것이다. 차 한 잔 시켜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나는 황 여사의 순진하고 내성적인 것 같은 성향과 수줍어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모든 대화는 내가 주도했었으니까. 또, 키 작은 여자를 좋아했기 때문에 황 여사의 키가 작은 것에도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다. 긴 이야기 끝에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다시 모슬포 인성리로 돌아갔던 기억이 난다.
그다음 날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만나 황 여사를 나에게 달라고 했다. 어떻게 가정을 꾸려가겠냐는 물음에 앞으로도 계속 군 생활을 하며 살아가겠다고 했다. 허락이 떨어졌으니, 다음에는 그 주 토요일에 진해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진해로 복귀했다.
여기서 잠깐! 내가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은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군인들 대부분 25살 정도 되면 결혼했다. 나는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내 동기 중에 ‘안종민’이라는 놈이 결혼해서 아들까지 낳아서 잘 살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좋아 보여서 나도 결혼을 해서 안정적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약속했던 토요일이 됐다. 나는 토요일이면 무조건 신병들을 이끌고 진해 천자봉에 올랐다. 부대에 복귀하고 있는데, 황 여사가 육정문 건너편에 와서 나를 보고 있었다. 신병들과 악을 쓰며 귀대한 후에 전화를 받고 바로 나가서 함께 자취방으로 이동했다. 거기서 이야기를 조금 나눈 후에 다방으로 가서 결혼 날짜를 잡았다.
신병 수료식을 하고서 다음 휴가를 나갈 수 있기에 일사천리로 날짜를 잡아버렸다. 너무 빠르다고 했지만, 내 생각을 굽히지 않고 계속 밀어붙여서 승낙이 떨어졌다. 그로서 황 여사를 본지 약 30일 만에 결혼했으니, 얼마나 빨랐는지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판단하시길 바란다.
1982년 11월 21일, 전남 영광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결혼식 전날에는 친지와 친구들, 군대의 선후배들과 집에서 잔칫상을 받았다. 술을 얼마나 먹었는지 큰 고모님의 방에서 자던 내 군대 동기생이 쥐새끼한테 귓바퀴를 갉아 먹히는 불상사도 일어났다.
아무튼 결혼식 당일에는 숙취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결혼식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결혼식을 마치고 나서는 군대 선후배들과 다시 한 잔씩 하고 진해로 보내주고, 연이어서 친구들과 한잔하고 나니 알딸딸했다.
작은 방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다음날 전북 고창의 내장산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그다음 날에는 전남 장성 백양사로 이동해서 둘째 날을 보냈다. 집으로 돌아와서 어르신들께 인사를 드리고 나니 아무런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이틀 후에는 목포항으로 이동했다. 처가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황 여사와 나, 둘만 간 게 아니었다. 큰고모님과 작은 고모님, 상동 당숙모님, 할머님이 함께 가셨다. 결혼 답례로 가셨었는지, 왜 우리끼리 다녀오게끔 안 하셨는지 참으로 아쉬운 결정이었다. 왜, 왜 그렇게 많은 어르신이 함께 가셨을까? 아직도 미지수로 남아있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우리가 함께하지 않았더라면, 그분들 중 제주도를 한 번도 가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도 있으셨을 것이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셨다.
함께 가신 할머님들은 내 처가가 아니고, 제주 누이네 집에 계시면서 여행도 하셨다. 그분들이 여행하고 계시는 동안 난 꼼짝도 못 하고 처가에서 잔치를 치렀다. 장인과 장모님, 이모와 이모부님들이 부르시면 잽싸게 뛰어가서 큰절을 하고, 트로트나 뽕짝으로 노래를 불러야만 했다. 이틀 동안, 큰절 300번 정도, 노래 부르기 300곡 정도를 하고 나니 하늘이 누리끼리해져서 더는 못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이틀을 지내고 밖으로 나올 기회가 있었다. 조그마한 밭에서 노란 감귤이 탐스럽게 익어 있었다. 밭으로 들어갔는데 내 키의 절반 정도 되는 감귤 나무에 얼마나 많은 감귤이 열렸는지, 너무나 먹고 싶어서 나무 하나를 선정하여 따먹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새에 한 나무를 다 따 먹어버리고는 오후부터 함평으로 출발할 때까지 복통과 설사로 혼쭐이 났다. 그래서 난 지금도 귤은 잘 먹지 않는다. 지금도 귤만 보면 설사부터 생각나니 아킬레스건이 아닌가 한다.
제주에서 함평을 들렀다가 진해에 가서 신혼살이를 시작했다. 그다지 기분 좋지 못한 신혼 살이, 생각하기도 싫은 신혼 살이, 아 정말 지긋지긋한 신혼살이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우리가 지금까지 산다는 것은 신혼 시절의 뭔가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해영. 옛 생각이 나게 해 줘서 고맙구나. 그러면 오늘은 이만. 푹 쉬어라.
집안에서 누가 심하게 밀어붙인 것도 아니고 정략결혼도 아니고 정치적 결혼도 아니었는데, 종용은 어째서 영숙과 서둘러 결혼을 한 것일까? 종용이 시골집 뒷산 너머 초등학교 2년 후배와 결혼했다면 어땠을까? 나와 동생은 세상에 없었겠지만, 종용과 영숙은 지금보다 더 행복했을까?
☎ Behind
그 초등학교 2년 후배는 왜 싫다고 하셨어요?
그냥 싫었어.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못생겼어요?
못생기지도 않았는데 싫었어.
아는 사람이긴 했어요?
잘 알았지.
근데도 별로였어요?
싸나웠어. 아주.
에이. 괜히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같은데?
그분은 잘 사셨대요? 재미나게?
우리 동창 형하고 사는데
재미나게는 잘 못 산 거 같아.
누가 밀어붙인 것도 아닌데,
결혼은 뭘 그렇게 급하게 했어요?
두세 달 만나보고 할 수도 있었잖아요.
혼자 자기 싫어서.
엥? 혼자 자는 게 왜 싫었어요?
혼자 자고 혼자 사는 게 너무 싫었어.
그래서 빨리 같이 살려고만 했지.
느그 엄마 같은 사람 만날 줄도 모르고. ㅋㅋㅋ
늦게 결혼했으면 더 생각해보고 더 골라보고
내하고 맞는 사람하고 했을 텐데.
다시 돌아간다면
뒷산 너머의 그 2년 후배와 결혼하시겠어요?
아니면 엄마랑 다시 결혼하시겠어요?
아무도 절대 안 만날 거야.
나 혼자 그냥 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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