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인연_1 21화

인연은 나를 변화시키는가

03 나 아닌 내가 되어가는 시간

by 현루

인연은 언제나 나를 나로만 남겨두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본래 가지고 있던 결을 흔들고, 새로운 결을 덧입히며, 때로는 내가 나라고 믿어온 경계마저 바꿔놓습니다.

누군가와의 만남은 단순한 교류가 아니라, 존재의 형태를 바꾸어가는 긴 여정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종종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서성이다가도, “나는 지금 누구 덕에 이렇게 되었는가”라는 물음에 더 오래 붙들리게 됩니다.

인연이란 끊임없는 자기 수정의 과정입니다.

어떤 인연은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각도를 바꾸어 놓습니다.

내가 늘 익숙하게만 보던 풍경이 전혀 다르게 다가오게 하는 힘,

그것이 인연이 가진 불가사의한 성질입니다.

내가 나였던 방식은 서서히 흐려지고, 상대를 통해 나 아닌 무언가로 변화해 가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그 과정은 대개 의식적으로 선택되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에, 어쩌면 짧은 대화 한마디에, 나는 내가 아닌 내가 되어가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이런 변화를 단순히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인연은 나를 더 넓은 세계로 이끌지만, 또 어떤 인연은 나를 내 본래의 자리에서 멀어지게도 합니다.

나 아닌 내가 되어가는 시간은 늘 축복인 동시에 위험입니다.

내가 진실로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상대의 그림자나 기대에 맞추어 왜곡된 모습으로 변화해 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연은 늘 두 갈래의 길을 동시에 열어둡니다. 하나는 내 본질을 더 명료하게 드러내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나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길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무엇이 나를 진실로 움직이고 있는가’를 묻는 일입니다.

내가 어떤 관계 속에서 변화하고 있다면, 그 변화의 동력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자문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의 자발적인 동의와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인연은 나를 나 아닌 나로 확장시키는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것이 두려움이나 강요, 혹은 인정받고자 하는 집착에서 비롯되었다면, 그 인연은 나를 흐리게 만드는 덫일 수 있습니다.

나 아닌 내가 되어간다는 것은 때로 자기 해체의 경험입니다.

내가 쌓아 올린 고정된 자아의 이미지가 조금씩 허물어지는 순간,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자유의 가능성도 숨어 있습니다. 내가 꼭 이래야만 한다는 집착을 내려놓을 때, 나는 다른 가능성으로 열릴 수 있습니다.

인연은 그 가능성을 흔들어 깨우는 자극입니다. 그래서 나 아닌 내가 되어가는 시간은 두려움과 자유가 동시에 교차하는 모순된 자리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깊이 연결될수록, 나라는 존재는 그 안에서 더욱 다층적으로 변합니다.

상대의 시선을 통해 내가 알지 못했던 나의 면모를 보게 되기도 하고, 상대의 기대 속에서 전혀 다른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이전과는 다른 나로 살아가게 됩니다.

인연은 이렇게 ‘나’를 무너뜨리면서도 새로운 ‘나’를 재구성합니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만으로는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나 아닌 내가 되어가는 시간이 결코 ‘나를 잃어버리는 시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인연은 내가 더 다채로운 나로 열리도록 이끄는 길이어야지, 나의 고유한 빛을 지워버리는 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를 확장시키는 변화와 나를 소멸시키는 변화를 구분하는 일, 그것이 인연 속에서 스스로에게 지켜야 할 최소한의 태도일 것입니다.

결국 인연은 나를 낯선 자리로 이끌어갑니다. 때로는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살아가게 만들고, 때로는 내가 두려워하던 영역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이 지나간 후 돌아보면, 나는 이미 내가 아닌 내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상실이 아니라, 또 다른 생성의 과정입니다. 나 아닌 내가 되어가는 시간은 내가 누구인가를 다시 묻는 시간이자, 내가 무엇으로도 될 수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연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변화 그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일 것입니다.

내가 아닌 내가 되어가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나는 비로소 더 넓은 나로 열릴 수 있습니다.

인연은 나를 변화시키는 힘이지만, 그 변화는 언제나 내가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기도 합니다. 결국 나 아닌 내가 되어가는 시간은, 내가 진정 누구인지를 더 깊이 알아가는 시간과 다르지 않습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