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나 아닌 내가 되어가는 시간
어떤 인연은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각도를 바꾸어 놓습니다.
내가 늘 익숙하게만 보던 풍경이 전혀 다르게 다가오게 하는 힘,
그것이 인연이 가진 불가사의한 성질입니다.
내가 나였던 방식은 서서히 흐려지고, 상대를 통해 나 아닌 무언가로 변화해 가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그 과정은 대개 의식적으로 선택되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에, 어쩌면 짧은 대화 한마디에, 나는 내가 아닌 내가 되어가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이런 변화를 단순히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인연은 나를 더 넓은 세계로 이끌지만, 또 어떤 인연은 나를 내 본래의 자리에서 멀어지게도 합니다.
나 아닌 내가 되어가는 시간은 늘 축복인 동시에 위험입니다.
내가 진실로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상대의 그림자나 기대에 맞추어 왜곡된 모습으로 변화해 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연은 늘 두 갈래의 길을 동시에 열어둡니다. 하나는 내 본질을 더 명료하게 드러내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나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길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무엇이 나를 진실로 움직이고 있는가’를 묻는 일입니다.
내가 어떤 관계 속에서 변화하고 있다면, 그 변화의 동력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자문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의 자발적인 동의와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인연은 나를 나 아닌 나로 확장시키는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것이 두려움이나 강요, 혹은 인정받고자 하는 집착에서 비롯되었다면, 그 인연은 나를 흐리게 만드는 덫일 수 있습니다.
나 아닌 내가 되어간다는 것은 때로 자기 해체의 경험입니다.
내가 쌓아 올린 고정된 자아의 이미지가 조금씩 허물어지는 순간,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자유의 가능성도 숨어 있습니다. 내가 꼭 이래야만 한다는 집착을 내려놓을 때, 나는 다른 가능성으로 열릴 수 있습니다.
인연은 그 가능성을 흔들어 깨우는 자극입니다. 그래서 나 아닌 내가 되어가는 시간은 두려움과 자유가 동시에 교차하는 모순된 자리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깊이 연결될수록, 나라는 존재는 그 안에서 더욱 다층적으로 변합니다.
상대의 시선을 통해 내가 알지 못했던 나의 면모를 보게 되기도 하고, 상대의 기대 속에서 전혀 다른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이전과는 다른 나로 살아가게 됩니다.
인연은 이렇게 ‘나’를 무너뜨리면서도 새로운 ‘나’를 재구성합니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만으로는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나 아닌 내가 되어가는 시간이 결코 ‘나를 잃어버리는 시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인연은 내가 더 다채로운 나로 열리도록 이끄는 길이어야지, 나의 고유한 빛을 지워버리는 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를 확장시키는 변화와 나를 소멸시키는 변화를 구분하는 일, 그것이 인연 속에서 스스로에게 지켜야 할 최소한의 태도일 것입니다.
결국 인연은 나를 낯선 자리로 이끌어갑니다. 때로는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살아가게 만들고, 때로는 내가 두려워하던 영역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이 지나간 후 돌아보면, 나는 이미 내가 아닌 내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상실이 아니라, 또 다른 생성의 과정입니다. 나 아닌 내가 되어가는 시간은 내가 누구인가를 다시 묻는 시간이자, 내가 무엇으로도 될 수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연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변화 그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일 것입니다.
내가 아닌 내가 되어가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나는 비로소 더 넓은 나로 열릴 수 있습니다.
인연은 나를 변화시키는 힘이지만, 그 변화는 언제나 내가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기도 합니다. 결국 나 아닌 내가 되어가는 시간은, 내가 진정 누구인지를 더 깊이 알아가는 시간과 다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