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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인연_1 20화

인연은 나를 변화시키는가

02 상처를 남기고 남겨지는 인연

by 현루

인연을 말할 때 우리는 흔히 따뜻한 만남, 의미 있는 관계, 서로에게 힘이 되는 연대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인연은 반드시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인연은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그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쉽게 아물지 않은 채 삶의 배경으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그러한 인연은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마음속에 흔적을 새기고, 결국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살아가는 태도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래서 상처를 주고받은 인연을 단순히 불운한 사건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그 아픔 속에서 우리는 변하고, 때로는 성숙하고, 어떤 때는 더 단단해집니다.

상처를 남기고 떠나는 인연은 대개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옵니다. 그

것은 한 마디 말일 수도 있고, 신뢰가 무너지는 사건일 수도 있으며, 오래도록 쌓아온 관계가 무너져 내리는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순간을 통해 인간관계의 불완전함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누구도 영원히 내 편일 수 없고, 내가 기대는 만큼 상대 역시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깨달음은 단순한 이성적 판단에 그치지 않습니다.

마음이 찢기는 듯한 감정의 고통을 동반하며, 때로는 삶 전체를 무너뜨리는 듯한 경험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처를 남긴 인연을 무조건 부정할 수 있을까요?

상처가 크다고 해서 그 인연 전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상처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진실도 존재합니다.

예컨대 내가 누군가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

혹은 내가 생각보다 쉽게 누군가를 해칠 수 있는 존재라는 깨달음은 대개 상처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드러납니다.

인연이 남긴 상처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더 깊이 성찰하게 만듭니다.

상처가 남는 이유는 단순히 관계의 종료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 인연 속에 쏟아부은 감정, 시간, 기대가 크기 때문에 그만큼의 공허가 남는 것입니다.

큰 그릇만큼 물이 쏟아지면 남는 자리도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아주 짧은 만남에서도 깊은 상처가 남을 수 있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 내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면, 그것은 긴 시간보다 더 오래 기억 속에 자리할 수 있습니다.

이제 중요한 물음이 생깁니다.

상처를 남긴 인연을 우리는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지워야 할까요, 아니면 받아들여야 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아픈 기억을 지우려 애쓰지만, 완전히 사라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오히려 억누른 기억은 다른 형태로 다시 떠오르곤 합니다.

그렇기에 상처는 지워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다루어야 할 대상입니다.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남겼는지, 그 경험이 나를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정직하게 마주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상처가 남긴 인연을 용서할 수도 있습니다. 용서는 상대를 위한 행위라기보다 나 자신을 위한 해방입니다.

그러나 모든 상처가 용서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상처는 그저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며,

그 기억 자체가 다시는 같은 아픔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경계가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용서와 망각은 선택의 문제이지 의무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처가 나를 어떻게 살아가게 만드는 가입니다.

인연이 남긴 상처는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더 예민하고 경계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다시는 같은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더 신중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나쁜 변화만은 아닙니다.

경계심은 때로는 스스로를 지켜내는 방패가 되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그 경계가 지나치면, 새로운 인연을 받아들이는 데에 문을 닫아버릴 위험도 있습니다. 상처는 우리를 보호하는 동시에 고립시킬 수 있습니다.

이 양면성을 이해하고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상처는 우리의 언어와 감수성을 바꿉니다. 같은 말이라도 아픔을 경험한 사람은 그 말속에 숨어 있는 칼날을 더 잘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힘들어할 때, 그 고통에 더 민감하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상처는 고통의 흔적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공감 능력을 열어주는 창이 되기도 합니다. 아픔 속에서만 길러지는 따뜻함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상처를 남기고 떠난 인연은 우리 삶에서 지워버릴 수 없는 흔적으로 남습니다.

그 흔적은 불완전하고, 때로는 보기 싫고, 또 때로는 여전히 아프지만, 그것을 통해 우리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배워갑니다.

상처는 내가 바라는 나와 현실의 나 사이의 간극을 드러내고, 그 틈을 어떻게 메워갈 것인지 질문을 던집니다. 인연의 상처는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자기 성찰의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처를 남기고 남겨지는 인연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단순히 잊어버리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자기 삶 속에서 소화해 내라는 요구일 것입니다.

상처는 삶의 일부로 남아 나를 변화시키고, 그 변화 속에서 나는 또 다른 나로 태어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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