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나에게 ‘걷는다’는 행위는 공기나 중력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선택의 영역이 아니라, 삶이라는 무대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바닥이었다.
걷는 동안 세계는 흐르는 강물처럼 빠르게 곁을 스쳐 지나갔고, 나는 그 속도가 유일한 정의인 양 의심 없이 몸을 맡겼다.
보도블록의 틈새나 계단의 개수 따위는 내 시야에 머물지 못했다.
그때의 나에게 세계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통과해야 할 통로’ 일뿐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삶의 전제가 무너졌다.
당연하게 여겼던 바닥이 사라지고 난 뒤에야 나는 깨달았다.
내가 딛고 서 있던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된 ‘우연’의 연속이었는지를.
걷지 못하게 된 이후, 이동은 더 이상 배경으로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은 매 순간 온몸의 감각을 동원해 조건을 확인해야 하는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이제 세계는 나에게 이전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요구한다.
바닥의 재질이 매끄러운지, 경사의 각도가 내 오른쪽 팔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지, 문턱의 높이가 휠체어 앞바퀴를 허용할 것인지.
한때는 보이지 않던 요소들이 이제는 이동의 중심으로 올라온다.
좌측 편마비라는 선고는 내 몸의 지도를 반으로 접어버렸다.
이제 나에게 쓸모 있는 감각과 근육은 오른쪽 팔과 다리뿐이다.
왼쪽 다리는 늘 휠체어 발판 위에 고정되어 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툭 떨어지거나 꺾이지 않도록, 그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만 하는 침묵의 존재가 되었다.
왼쪽 팔 역시 마찬가지다.
스스로는 단 1cm도 움직일 수 없는 마비 상태의 팔은 내 몸의 일부이면서도 동시에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오른손 하나로 휠체어 구동 바퀴를 밀며 중심을 잡는 일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한다.
조금만 힘을 잘못 주면 휠체어는 자꾸만 왼쪽으로 휘어진다.
마비된 왼쪽 몸의 무게가 중력의 법칙에 따라 나를 자꾸만 어둠 쪽으로 끌어당기는 기분이다.
그래서 나는 이동할 때마다 오른쪽 팔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휠체어를 미는 손바닥의 굳은살은 내가 세계와 싸워 얻은 훈장과도 같다.
오른발은 땅을 차거나 위치를 조정하며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 불균형한 사투 속에서, 이동은 더 이상 무의식적인 행위가 아니라 치열한 전략적 선택의 연속이 되었다.
특히 비 오는 날의 외출은 한 편의 거대한 전쟁과 같다.
걷는 자들에게 비는 낭만이거나 약간의 번거로움이겠지만, 오른쪽 팔만 사용 가능한 나에게 비는 세계가 내미는 노골적인 거절이다. 우산을 들 수 없는 손 대신 우비 속에 몸을 구겨 넣고, 빗물에 미끄러워진 구동 바퀴를 오른손으로 꽉 쥐어본다.
바퀴를 밀 때마다 튀어 오르는 빗물이 마비된 내 왼쪽 팔을 적신다.
아무런 감각도 없는 그 차가운 축축함을 바라보며, 나는 내가 비로소 이 세계의 '표준'에서 멀어졌음을 실감한다.
특히 ‘턱’이라는 구조물은 나에게 세계의 태도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전의 나는 턱을 거의 인식하지 않았다.
그것은 넘어야 할 대상조차 아니었고, 기억에 남지 않는 투명한 요소였다.
그러나 지금의 나에게 5cm 남짓한 턱은 명확한 질문이 된다.
어느 식당 입구에서 나는 멈춰 섰다.
휠체어에 앉아 마주한 식당 입구는 낯설기만 했다. 입구에 놓인 딱 5cm 높이의 투박한 시멘트 턱. 예전에는 보폭을 조절할 필요조차 없이 지나쳤던 그 사소한 높이가 그날은 거대한 성벽처럼 느껴졌다.
오른손으로 바퀴를 꽉 쥐고 반동을 주려 했으나, 중심을 잡아줄 왼쪽 팔이 힘없이 처져 있는 탓에 휠체어는 자꾸만 뒤로 기우뚱거렸다.
그 5cm 앞에서 나는 멈춰 섰다. 그리고 그 턱은 나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졌다.
“이곳은 누구를 기준으로 만들어졌는가?”
“이 공간은 누구의 진입을 허용하고, 누구의 존재를 지우고 있는가?”
이 멈춤은 실패가 아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서 생기는 판단의 시간이다.
도움을 요청할지, 아니면 이 길을 포기하고 먼 길을 돌아갈지를 결정하는 순간마다 나는 세계의 구조를 다시 읽게 된다.
그 구조는 때로 친절하게 경사로를 내어주며 나를 안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때로는 무심한 높이로 나를 밀어낸다.
그 무심함은 악의가 없어서 더 서늘하다.
애초에 나 같은 몸을 가진 존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턱의 높이에 고스란히 박혀 있기 때문이다.
걷지 못하게 되면서 속도에 대한 감각도 달라졌다. 세상은 여전히 초단위로 쪼개진 채 빠르게 흐르지만, 나는 더 이상 그 흐름에 억지로 합류하려 애쓰지 않는다.
아니, 합류할 수 없게 되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속도에서 비껴 난 자리에서는 이전에 보이지 않던 장면들이 남는다.
길을 가다 마주친 보도블록의 파손된 틈새를 보며 누군가의 고단한 노동과 세월을 읽는다.
걷는 이들이 보지 못하고 밟고 지나갔을 그 균열이 나에게는 ‘우회해야 할 신호’가 된다.
시선이 낮아지니 사람들의 뒷모습, 바쁘게 움직이는 발걸음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만 보이는 장난감 가게의 진열대 아래쪽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다리는 사람의 초조한 표정, 건물 벽면에 반복된 보수의 흔적, 무심히 놓인 안내문 하나까지. 세계는 늘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내가 너무 빨랐던 탓에 지나쳐왔을 뿐이라는 사실이 조금씩 분명해졌다.
몸이 바뀌자 세계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세계가 얼마나 특정한 몸을 전제로 구성되어 있었는지가 드러났다고 느낀다.
이전의 나는 그 전제 안에 있었고, 그래서 질문하지 않았다.
질문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는 오래 머물수록 투명해진다.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 세상의 부조리는 보이지 않는 법이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평범한 일상’은 사실 수많은 배제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계단을 오를 수 있다는 전제, 누군가가 양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설계된 세계에서 그 전제에 부합하지 않는 이들은 소리 없이 지워진다.
이제 내가 그 자리에 서게 되자, 비로소 세상의 설계도가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세계를 통과하지 않는다.
머무르고, 확인하고, 선택한다.
이동은 느려졌지만, 대신 의미는 늘어났다.
빠르게 지나갈 때는 보이지 않던 질문들이, 멈춘 자리에서는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자리에서, 나는 이제야 세계를 하나의 질문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걷지 못하게 된 이후에야, 보이지 않던 것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이 느리고도 깊은 여행의 기록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