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롱 섞인 바람을 막아선 요석의 지혜와 소년 설총의 눈물
서라벌의 봄은 화려했으나 요석궁의 봄은 소리 없이 찾아왔다.
뜰에는 배롱나무 꽃이 분홍빛 꽃망울을 터뜨리고, 담장 너머 문천교 주변에는 수양버들이 연둣빛 머리칼을 흔들며 상춘객들을 유혹했다.
그러나 그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도 요석궁을 감싸고 있는 공기는 여전히 무겁고 예리했다. 어느덧 일곱 살이 된 설총은 또래보다 키가 훌쩍 컸고, 눈동자는 깊은 밤의 호수처럼 맑으면서도 서늘한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아이는 총명했다.
한 번 들은 글자는 잊지 않았고, 어머니 요석이 들려주는 경전의 구절들을 마치 제 생각인 양 읊어내곤 했다.
하지만 그 총명함은 오히려 아이에게 독이 되었다. 설총은 자신의 이름 앞에 붙는 무수한 수식어들을 너무 빨리 알아차려 버렸다.
궁궐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신분이었으나, 담장 너머로 날아 들어오는 아이들의 짓궂은 노래와 대신들의 차가운 눈빛은 어린 설총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찍었다.
"어머니, '파계승의 자식'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사람들은 왜 저를 보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리는 건가요? 그리고 제 아버지는 왜 이 높은 담장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시는 건가요?"
어느 화창한 봄날 오후, 설총은 읽고 있던 죽간을 덮으며 요석에게 물었다.
아이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그 끝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요석은 수놓던 바늘을 멈추었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녀는 아들을 가까이 불러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소년의 몸에서는 아직 갓 구운 떡 같은 달콤한 냄새가 났지만, 그 어깨는 벌써부터 이 험난한 세상의 무게를 견디려는 듯 단단해져 있었다.
요석은 아들의 작은 손바닥을 펼쳐 자신의 손가락으로 천천히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총아,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담장과 눈에 보이지 않는 담장이 있단다.
하나는 너를 보호하기 위해 내가 쌓은 이 돌담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마음속에 쌓은 편견이라는 담장이란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거대한 진리를 마주할 때 두려움을 느끼고, 그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돌을 던진단다.
너를 향한 말들은 네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작기 때문이란다."
설총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요석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아버지는 위대한 스님이라고 하셨잖아요. 할아버지인 무열왕께서도 인정하신 천재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사람들은 아버지를 욕하나요? 아버지가 정말 나쁜 짓을 해서 제가 이렇게 숨어 지내야 하는 건가요? 저도 남들처럼 아버지의 손을 잡고 서라벌 시장을 걷고 싶어요."
요석의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그녀는 원효가 요석궁을 떠나던 날 남겼던 그 형형한 눈빛을 떠올렸다.
그는 죄를 지어서 떠난 것이 아니라, 더 큰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시궁창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었다.
"네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용기를 낸 사람이란다. 부처님의 제자라는 화려하고 안락한 자리를 버리고, 가장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 곁으로 가기 위해 스스로 누더기를 걸치신 거야. 너는 '중의 자식'이 아니라, '자비의 결실'이란다.
네 아버지가 저 담장 밖에서 춤을 추는 것은 너를 버려서가 아니라, 네가 살아갈 이 세상을 더 따뜻하게 만들기 위함이란다. 너는 아버지 없는 아이가 아니라, 세상 모든 아버지를 가진 아이란다."
어머니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설총의 가슴에 난 생채기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소년은 밤마다 서고에 박혀 잠도 자지 않고 책을 읽었다.
유교의 경전부터 노장사상의 비기까지, 그는 이 세상의 부조리한 이치를 설명해 줄 답을 찾으려 애썼다.
어느 날, 설총은 참다못해 몰래 궁궐 담장을 넘었다.
어머니 몰래 아버지가 머문다는 저잣거리로 향한 것이다.
남루한 하인의 옷으로 변장을 하고 나선 길이었지만, 소년의 눈에 비친 서라벌의 풍경은 요석궁 안의 정제된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흙먼지가 날리고, 술 취한 사내가 비틀거리며, 아이들이 굶주림에 울고 있는 아수라장이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헐뜯고,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 아우성치고 있었다.
그 길 한복판에서 설총은 아버지를 보았다.
아니, 사람들이 '원효'라 부르는 그 기이한 사내를 보았다. 그는 시장 한복판에서 옹기그릇을 두드리며 기이한 춤을 추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며 미친 중이라 비웃었지만, 신기하게도 그 비웃음 속에는 묘한 활기가 있었다. 원효가 춤을 한 번 출 때마다 굶주린 아이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고, 원효가 노래를 한 소절 부를 때마다 고단한 지게꾼의 어깨가 가벼워졌다.
설총은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숨이 멎는 듯했다.
아버지는 왕실의 비단옷보다 저 누더기가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 여인의 남편이나 한 아이의 아버지로 남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존재였다.
그는 서라벌 전체의 아버지였고, 고통받는 모든 이들의 도반이었다.
소년은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왜 담장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지를.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전체를 자신의 집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궁으로 돌아온 설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요석의 매서운 회초리였다.
그녀는 아들을 꾸짖었지만, 설총의 눈에는 예전과 다른 빛이 서려 있었다.
"어머니, 오늘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미친 것이 아니라, 잠든 사람들을 깨우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의 조롱은 아버지의 춤사위 속에서 노래가 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 제 출생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낮은 곳으로 가셨으니, 저는 그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높은기둥이 되겠습니다."
요석은 들고 있던 회초리를 떨어뜨렸다.
그녀는 아들을 끌어안고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사실 요석 역시 매일 밤 불안함과 싸우고 있었다. 행여 자신의 선택이 아들의 인생을 망치지는 않을지, 원효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이기적인 욕심은 아니었을지 스스로를 검열해 왔다.
하지만 아들은 어느덧 스스로 답을 찾아 돌아와 있었다.
"그래, 총아. 나는 너를 세상으로부터 지키는 단단한 담장이 되려 했지만, 너는 이미 그 담장을 넘어 큰 산을 보았구나. 이제 나는 너를 가두지 않으려 한다. 대신 네가 보고 온 그 아픈 세상을 치유할 수 있는 너만의 문장을 만들어라.
네 아버지가 입으로 도를 전한다면, 너는 붓으로 이 땅에 도를 새겨야 한다."
요석은 그날 이후 설총에게 더욱 엄격하고 체계적인 교육을 시작했다.
그녀는 설총에게 신라의 역사를 가르치고, 왕실의 예법을 익히게 했으며, 동시에 백성들의 고통을 잊지 않도록 매일 저녁 함께 명상을 했다.
요석은 스스로가 설총을 세상의 비바람으로부터 막아주는 든든한 '담장'이 되되, 아들이 언제든 하늘로 솟구칠 수 있도록 지지대 역할을 자처했다.
세월은 유수와 같아 소년 설총의 이마에는 지혜의 주름이 자리 잡기 시작했고, 요석의 머리칼에는 흰 눈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지켜온 요석궁의 등불은 단 한 번도 꺼진 적이 없었다. 설총은 이제 어려운 한문 경전을 신라의 말로 풀이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것은 아버지가 저잣거리에서 부르던 그 생생한 소리를 문자로 고정하는 작업이었다.
"어머니, 한자는 너무 어렵고 백성들의 마음을 다 담지 못합니다. 저는 우리 신라의 소리를 담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고 싶습니다."
요석은 아들의 붓끝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것이 바로 네 아버지가 원했던 '자루 없는 도끼'로 깎는 기둥이란다.
사람들의 마음을 잇는 글자, 그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자비란다."
요석궁의 담장은 여전히 높고 단단했다.
하지만 그 담장은 더 이상 소외와 단절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장 위대한 사상이 잉태되는 자궁이었고, 가장 절절한 사랑이 숙성되는 항아리였다.
원효가 남기고 간 무애가의 장단은 설총의 가슴속에서 천 년을 버틸 이두(吏讀)의 뿌리가 되어 깊게 내려앉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서라벌의 달빛이 요석궁의 기와를 은빛으로 물들였다.
요석은 잠든 아들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사랑이란 결국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담장이 되어주는 일이며, 그 담장 안에서 자라난 아이가 다시 세상을 향해 문을 여는 과정을 지켜보는 숭고한 기다림이라는 것을.
요석과 원효, 두 사람이 빚은 '파계의 꽃'은 이제 신라라는 거대한 대지에 향기를 퍼뜨릴 준비를 마쳐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