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를 뚫고 핀 별, 신라의 문장을 잉태하다
서라벌의 겨울은 가혹했다.
북쪽 대륙에서 불어온 칼바람은 금성을 휘감고 지나며 요석궁의 기와 위로 차디찬 성에를 두껍게 입혔다.
대지를 적시며 흐르던 문천교의 물줄기마저 꽁꽁 얼어붙어 정적만이 감돌던 그 밤,
요석궁의 가장 깊은 곳인 공주의 처소에서는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담장 밖까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육신이 겪는 고통의 울부짖음이 아니었다.
지난 사흘간의 꿈같은 사랑 뒤에 찾아온 세상의 멸시, 그리고 홀로 견뎌온 고독의 무게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생명의 비명이자, 인고의 세월이 토해내는 거친 숨결이었다.
요석 공주는 산통(産痛)을 겪으며 땀에 젖은 비단 머리카락을 손가락이 하얘지도록 움켜쥐었다. 그녀는 눈을 감을 때마다 그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거친 누더기를 걸치고도 눈빛만은 샛별처럼 형형하던 사내, 원효.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겪는 진통이 원효가 겪었을 '파계의 진통'과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부처를 버리고 인간을 택했고, 자신은 안락한 공주의 삶을 버리고 외로운 어머니의 길을 택했다. 두 사람이 함께 저지른 '거룩한 파계'가 이제 곧 세상의 빛을 보려 하고 있었다.
“공주님,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아기씨의 머리가 보입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내십시오!”
노상궁의 다급한 외침이 요석의 귓가를 울렸지만, 그녀의 의식은 이미 현실의 고통을 넘어 저 멀리 안개 낀 남산을 향하고 있었다.
요석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그리움을 토해내듯 마지막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향한 절절한 부름이자, 한 시대를 짊어질 새로운 생명을 맞이하는 장엄한 신고식이었다.
같은 시각, 서라벌의 어두운 저잣거리에서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시장 한복판, 소성거사 원효가 바가지를 두드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평소처럼 흥겨운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던 그의 몸짓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갑자기 멈췄다.
그의 고개가 요석궁이 있는 동쪽 하늘을 향해 홱 돌아갔다.
원효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것은 수행자의 신통력으로 느끼는 예감이 아니었다.
한 여인을 품었던 사내로서, 그리고 한 아이의 아비로서 느끼는 지독한 통증이자, 자신이 심어놓은 '하늘을 받칠 기둥'이 얼어붙은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진동이었다.
원효의 맑은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져 차가운 눈바닥을 적셨다.
그는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도, 춤을 출 수도 없었다.
대신 그는 너풀거리는 누더기 옷자락을 휘날리며 요석궁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오셨는가. 천 년의 어둠을 뚫고, 이 미천한 아비의 업보와 자비를 동시에 짊어질 아이가 오고 있는가.”
주변의 취객들과 거지들은 미친 중이 또 헛소리를 한다며 조롱하며 지나갔지만, 원효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가운 얼음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그는 자신이 파계를 통해 얻은 그 귀한 생명이, 이제는 죽은 문자가 아닌 살아있는 소리가 되어 이 세상을 비추길 간절히 기도했다.
그는 요석이 겪고 있을 처절한 산고를 자신의 온몸으로 대신 받으려는 듯, 이를 악물고 몰아치는 눈보라를 맨몸으로 견뎌냈다.
그가 머리를 숙인 자리 주변으로 신기하게도 눈이 녹아내리며 따스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것은 원효가 바칠 수 있는 가장 뜨거운 부정(父情)의 증명이었다.
밤이 가장 깊고 어두워 만물이 숨을 죽이는 인시(寅時), 요석궁의 처마 끝에 위태롭게 걸려 있던 고드름이 툭 하고 부러졌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깨뜨리는 우렁찬 울음소리가 요석궁 전체를 진동시키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응애! 응애!”
그것은 단순히 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낡고 고루한 신라의 질서를 뒤흔드는 천둥소리였고, 어려운 한자에 갇혀 제 뜻을 펴지 못하던 민초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해방의 종소리였다.
요석은 탈진해 늘어진 채로 산실청의 희미한 등불 아래 놓인 아기를 보았다.
갓 태어난 아기는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채 작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마치 이 험난한 세상을 당당히 걸어가겠다는 서늘한 다짐처럼 보였다.
“아... 나의 아가야.”
요석은 떨리는 손으로 아기의 뺨을 조심스레 만졌다.
아기의 피부는 비단보다 부드러웠고 몸에서 배어 나오는 온기는 난로처럼 뜨거웠다.
그녀는 아기의 얼굴에서 원효의 단단한 턱선과 깊은 눈매, 그리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맑은 기운을 발견했다.
아이의 이름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설총(薛聰)'. 총명함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히라는 뜻이자, 아버지 원효가 버렸던 성(姓)을 다시 찾아 당당히 세운 징표였다.
무열왕 김춘추는 멀리서 들려오는 손자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창밖의 눈보라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는 왕으로서 이 부적절한 관계를 질타해야 하는 위치였으나, 한 인간으로서는 이 신비로운 탄생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효와 요석, 두 사람이 빚어낸 이 인연의 열매가 장차 신라의 모든 소리를 담아내고 민족의 정신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그릇이 될 것임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났지만, 요석의 고난은 이제부터 진정한 시작이었다.
아기를 안고 기뻐할 틈도 없이 궁궐 내의 시선은 날카로운 칼날보다 더 차갑게 돌변했다.
보수적인 대신들은 “파계승의 자식이 어찌 성스러운 왕실의 궁궐에서 자랄 수 있느냐”며 비아냥거렸고, 엄격한 율법을 따르는 승단에서는 요석 공주를 '불법을 더럽힌 마녀'로 몰아세웠다.
그러나 요석은 그 모든 비난의 화살을 자신의 가슴으로 받아내며 설총을 지켰다.
그녀는 아기를 품에 안고 단 한 번도 고개를 숙이거나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더욱 당당하게 설총에게 젖을 물렸고, 아버지가 떠나며 남긴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매일 밤 귓속말로 속삭여주었다.
“총아, 사람들은 네 아버지가 우리를 버리고 도망쳤다고 말한단다. 하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란다. 그는 너와 나를 위해, 그리고 이 땅에서 고통받는 모든 슬픈 사람들을 위해 가장 높은 법당에서 가장 낮은 길바닥으로 내려간 것이란다. 너 또한 언젠가 그 길을 가야 한다. 칼이 아닌 붓으로, 소리가 아닌 문자로 사람들의 마음을 잇는 성벽이 되어야 한다.”
어린 설총은 어머니의 품 안에서 자장가 대신 원효의 '화쟁(和諍)'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났다. 요석의 젖줄은 설총에게 육체적인 생명을 부여했고, 그녀의 눈물 섞인 가르침은 설총에게 흔들리지 않는 정신적 뼈대를 만들어주었다. 원효는 밖에서 춤을 추며 세상을 깨우고 있었고, 요석은 안에서 글을 가르치며 세상을 품어 기르고 있었다.
설총이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을 무렵, 요석궁 마당에는 계절을 잊은 듯 유난히 붉고 탐스러운 연꽃이 피어올랐다.
요석은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연꽃 연못가에 앉았다.
아이의 맑은 눈동자에는 이미 서라벌 전체를 품고도 남을 거대한 지혜의 빛과 아버지를 닮은 고집스러운 열정이 서려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언제 우리 집에 오시나요? 저 담장 너머에 계신 건가요?”
어린 설총의 순수한 물음에 요석은 멀리 노을이 지는 남산의 능선을 가리켰다.
“네 아버지는 저 바람 속에도 계시고, 네가 매일 읽는 책장 사이의 여백에도 계신단다. 우리가 간절히 보고 싶어 하면 언제든 소리로 나타나시는 분이지. 다만, 네가 스스로의 힘으로 대지에 뿌리를 내릴 때까지 아버지는 너를 멀리서 지켜보고 계실 뿐이란다.”
요석은 이제 확신할 수 있었다.
원효가 파계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자신에게 준 것은 한 명의 다정한 남편이 아니라, 한 명의 위대한 스승이자 자립하는 자식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설총의 해맑은 웃음소리 속에 원효의 무애가가 섞여 들려왔고, 자신의 긴 기다림 속에 신라의 새로운 문명이 힘차게 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밤, 요석은 잠든 설총의 머리맡에서 원효가 남기고 간 낡은 가사를 소중히 매만졌다.
비록 몸은 천 리 길 밖에 떨어져 있었으나, 세 사람의 영혼은 '사랑'이라는 거대한 그물로 촘촘히 엮여 있었다.
요석궁의 담장은 여전히 높고 견고했지만, 그 안에서 자라나는 아이는 이미 담장 밖의 드넓은 세상을 향해 날갯짓을 할 준비를 마쳐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