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가 문장이 되는 찰나, 아버지의 장단에 맞춘 아들의 붓질
서라벌의 여름은 지독한 열기를 품고 찾아왔다. 지열에 달궈진 돌담은 한낮의 열기를 머금어 묵직한 흙냄새를 풍겼고, 요석궁의 울창한 숲에서는 매미들이 마치 제 생을 다 불태우려는 듯 악착같이 울어댔다.
어느덧 소년의 티를 벗고 청년의 골격이 잡히기 시작한 설총은 서고의 서늘한 그늘에 앉아 죽간을 펼치고 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자꾸만 담장 너머 먼 곳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매미 소리의 불규칙한 소동을 뚫고, 기이할 정도로 일정한 박자감이 섞인 소리가 들려왔다.
'탁, 타닥, 탁.'
그것은 절집의 장중한 목탁 소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광대들의 경쾌한 장구 소리도 아니었다. 잘 말린 박(바가지)을 단단한 막대기로 두드리는 듯한, 투박하면서도 가슴속을 직접 때리는 듯한 묵직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담장을 타고 넘어와 설총의 심장 박동과 묘하게 어우러졌다.
설총은 들고 있던 붓을 멈췄다.
심장이 이유 없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왜 이 무더운 오후에 자신의 집 담벼락 밑을 서성이고 있는지 말이다.
설총은 어머니 요석이 잠시 처소를 비운 틈을 타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은 채 마당으로 뛰어 나갔다. 담장 밑에 다다르자 소리는 더욱 선명해졌다.
박 소리와 함께 나직한 콧노래가 들려왔다.
가사도 없는 흥얼거림이었으나, 그 안에는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기쁨을 다 겪어본 자만이 낼 수 있는 깊은 안식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설총은 거친 돌담에 귀를 바짝 댔다. 거친 돌의 질감이 뺨에 닿았고, 담장 너머에서는 땀 냄새와 흙내음, 그리고 알 수 없는 향내가 섞여 올라왔다.
"거기... 누구십니까?"
설총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담장 너머의 박 소리가 뚝 멈췄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소년의 물음에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니라, 다시 시작된 부드러운 박 소리였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느리고 다정한 박자였다. 마치 아버지가 자식의 머리를 쓰다듬듯, 소리는 담장을 타고 설총의 온몸을 감쌌다.
담장 밖의 사내, 원효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아들이 담장 너머에서 자신을 느끼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아들에게 해줄 말이 너무도 많았으나, 그것을 사람의 말로 내뱉는 순간 도리어 그 의미가 훼손될까 두려웠다.
대신 그는 박을 두드려 자신의 심장을 전했다.
'총아, 나는 여기 있단다. 너를 이 세상에 있게 한 내가, 이 거친 길바닥 위에 서서 너를 지켜보고 있단다.'
설총은 담장을 기어오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멈춰 섰다. 어머니 요석이 늘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총아, 네 아버지는 눈으로 보는 분이 아니라 마음으로 만나는 분이란다. 그분이 담장을 넘지 않는 것은 네가 스스로의 길을 완성할 때까지 기다려주시는 자비란다. 그분을 억지로 보려 하지 마라. 대신 그분의 소리를 네 가슴에 새겨라."
설총은 주먹을 꽉 쥐고 담장을 향해 깊이 머리를 숙였다.
비록 눈을 맞추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올리는 생애 첫 정식 절이었다.
보이지 않는 벽 너머에 자신의 뿌리가 있었다. 자신을 이 세상에 있게 한 근원이 단 몇 치 두께의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 있었다.
박 소리가 서서히 멀어지자, 설총은 서고로 돌아와 앉았다.
방금 들었던 그 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탁, 타닥, 탁.' 그 소리는 단순한 박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신라 사람들이 슬플 때 내는 신음이었고, 기쁠 때 지르는 함성이었으며, 배고플 때 내는 탄식이었다.
"아버지는 박을 두드려 소리를 내셨고, 그 소리는 글을 모르는 백성들의 가슴을 울렸다. 그렇다면 나는 붓을 들어 저 소리를 문자로 옮겨야 한다."
설총은 깨달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배운 한자는 너무도 높고 단단한 성벽 같았다.
중국의 말과 신라의 소리는 달랐기에, 한자로 적힌 글들은 백성들의 마음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다. 백성들은 자신의 슬픔을 적고 싶어도 한자의 획 속에 갇혀 길을 잃었다.
설총은 아버지가 두드렸던 그 박 소리의 장단을 우리말의 소리에 맞춰 한자의 획 속에 녹여 넣기로 결심했다.
그는 밤마다 등잔불 아래에서 한자의 복잡한 모양을 빌려 우리말의 조사와 어미를 표기하는 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원효가 박을 두드려 가사 없는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창조적인 고통이었다.
"이 글자가 백성들의 소리를 담는 그릇이 된다면, 아버지가 담장 밖에서 두드린 박 소리는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요석은 밤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아들의 방을 보며 조용히 다가갔다.
방 안에서는 거친 숨소리와 함께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사방에 먹물이 튄 종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 종이들 위에는 한자인 듯하면서도 한자가 아닌, 기묘한 형태의 글자들이 살아서 꿈틀대고 있었다.
"어머니, 보십시오. 이것은 아버지가 주신 소리입니다."
설총이 내민 종이에는 '이두(吏讀)'의 초기 형태가 적혀 있었다.
백성들이 실생활에서 쓰는 말의 순서대로 한자를 배치하고, 그 사이사이에 신라의 소리를 상징하는 부호를 넣은 것이었다.
요석은 아들의 글자를 하나하나 손으로 짚어보았다.
그것은 원효가 파계를 통해 세상으로 내려갔듯, 고결한 문자가 백성들의 삶 속으로 내려온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요석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총아, 네 아버지는 입으로 세상을 구하려 했으나 너는 글로써 세상을 잇고 있구나. 네 아버지가 담장 너머에서 박을 두드린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그분은 네게 장단을 가르쳐주러 오셨던 게야. 네가 그 장단에 맞춰 춤추듯 글을 쓸 수 있게 말이다."
요석은 아들을 품에 안았다.
그녀가 원효를 위해 지켰던 정조와 기다림은 헛되지 않았다.
그녀의 인고는 아들의 학문적 열정으로 꽃피어, 신라라는 나라의 정신적 기둥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그날 이후 설총의 공부는 더 이상 고립된 독백이 아니었다.
그는 매일 아침 담장 밑에 나가 앉아 소리를 기다렸다.
비록 아버지가 매일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설총은 이제 바람 소리에서도, 빗소리에서도 아버지의 박 소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아버지가 계신 곳은 저잣거리이고, 내가 있는 곳은 이 서고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이 글자 속에서 만납니다."
설총은 아버지가 저잣거리에서 부르던 노래 가사들을 이두로 옮겨 적기 시작했다.
"모든 것에 걸림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生死)를 벗어나리라."
그 거창한 문장이 신라의 투박한 소리로 적혔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어려운 불교 철학이 아니라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한 위로가 되었다.
요석궁의 담장은 여전히 높았다.
그러나 설총에게 그 담장은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리를 공명 시키는 거대한 악기였고, 아버지가 남긴 사랑을 숙성시키는 항아리였다. 원효가 남기고 간 박 소리는 설총의 붓끝에서 천 년을 버틸 문장의 씨앗이 되어 신라의 대지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어느덧 서라벌의 하늘 위로 둥근달이 떠올랐다.
그 달빛은 요석궁의 담장 안팎을 차별 없이 비추었고, 설총은 그 빛을 받아 새로운 신라의 소리, 즉 백성의 마음을 담은 문장을 한 획 한 획 정성껏 그어나갔다.
그것은 사랑이 문명이 되는 장엄한 기록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