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저잣거리의 무애가, 담장 너머의 박 소리

소리가 문장이 되는 찰나, 아버지의 장단에 맞춘 아들의 붓질

by 현루

​서라벌의 여름은 지독한 열기를 품고 찾아왔다. 지열에 달궈진 돌담은 한낮의 열기를 머금어 묵직한 흙냄새를 풍겼고, 요석궁의 울창한 숲에서는 매미들이 마치 제 생을 다 불태우려는 듯 악착같이 울어댔다.

어느덧 소년의 티를 벗고 청년의 골격이 잡히기 시작한 설총은 서고의 서늘한 그늘에 앉아 죽간을 펼치고 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자꾸만 담장 너머 먼 곳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매미 소리의 불규칙한 소동을 뚫고, 기이할 정도로 일정한 박자감이 섞인 소리가 들려왔다.
​'탁, 타닥, 탁.'
​그것은 절집의 장중한 목탁 소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광대들의 경쾌한 장구 소리도 아니었다. 잘 말린 박(바가지)을 단단한 막대기로 두드리는 듯한, 투박하면서도 가슴속을 직접 때리는 듯한 묵직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담장을 타고 넘어와 설총의 심장 박동과 묘하게 어우러졌다.

설총은 들고 있던 붓을 멈췄다.

심장이 이유 없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왜 이 무더운 오후에 자신의 집 담벼락 밑을 서성이고 있는지 말이다.
​설총은 어머니 요석이 잠시 처소를 비운 틈을 타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은 채 마당으로 뛰어 나갔다. 담장 밑에 다다르자 소리는 더욱 선명해졌다.

박 소리와 함께 나직한 콧노래가 들려왔다.

가사도 없는 흥얼거림이었으나, 그 안에는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기쁨을 다 겪어본 자만이 낼 수 있는 깊은 안식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설총은 거친 돌담에 귀를 바짝 댔다. 거친 돌의 질감이 뺨에 닿았고, 담장 너머에서는 땀 냄새와 흙내음, 그리고 알 수 없는 향내가 섞여 올라왔다.

​"거기... 누구십니까?"


​설총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담장 너머의 박 소리가 뚝 멈췄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소년의 물음에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니라, 다시 시작된 부드러운 박 소리였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느리고 다정한 박자였다. 마치 아버지가 자식의 머리를 쓰다듬듯, 소리는 담장을 타고 설총의 온몸을 감쌌다.
​담장 밖의 사내, 원효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아들이 담장 너머에서 자신을 느끼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아들에게 해줄 말이 너무도 많았으나, 그것을 사람의 말로 내뱉는 순간 도리어 그 의미가 훼손될까 두려웠다.

대신 그는 박을 두드려 자신의 심장을 전했다.


​'총아, 나는 여기 있단다. 너를 이 세상에 있게 한 내가, 이 거친 길바닥 위에 서서 너를 지켜보고 있단다.'


​설총은 담장을 기어오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멈춰 섰다. 어머니 요석이 늘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총아, 네 아버지는 눈으로 보는 분이 아니라 마음으로 만나는 분이란다. 그분이 담장을 넘지 않는 것은 네가 스스로의 길을 완성할 때까지 기다려주시는 자비란다. 그분을 억지로 보려 하지 마라. 대신 그분의 소리를 네 가슴에 새겨라."


​설총은 주먹을 꽉 쥐고 담장을 향해 깊이 머리를 숙였다.

비록 눈을 맞추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올리는 생애 첫 정식 절이었다.

보이지 않는 벽 너머에 자신의 뿌리가 있었다. 자신을 이 세상에 있게 한 근원이 단 몇 치 두께의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 있었다.

​박 소리가 서서히 멀어지자, 설총은 서고로 돌아와 앉았다.

방금 들었던 그 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탁, 타닥, 탁.' 그 소리는 단순한 박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신라 사람들이 슬플 때 내는 신음이었고, 기쁠 때 지르는 함성이었으며, 배고플 때 내는 탄식이었다.


​"아버지는 박을 두드려 소리를 내셨고, 그 소리는 글을 모르는 백성들의 가슴을 울렸다. 그렇다면 나는 붓을 들어 저 소리를 문자로 옮겨야 한다."


​설총은 깨달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배운 한자는 너무도 높고 단단한 성벽 같았다.

중국의 말과 신라의 소리는 달랐기에, 한자로 적힌 글들은 백성들의 마음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다. 백성들은 자신의 슬픔을 적고 싶어도 한자의 획 속에 갇혀 길을 잃었다.

설총은 아버지가 두드렸던 그 박 소리의 장단을 우리말의 소리에 맞춰 한자의 획 속에 녹여 넣기로 결심했다.
​그는 밤마다 등잔불 아래에서 한자의 복잡한 모양을 빌려 우리말의 조사와 어미를 표기하는 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원효가 박을 두드려 가사 없는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창조적인 고통이었다.


​"이 글자가 백성들의 소리를 담는 그릇이 된다면, 아버지가 담장 밖에서 두드린 박 소리는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요석은 밤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는 아들의 방을 보며 조용히 다가갔다.

방 안에서는 거친 숨소리와 함께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사방에 먹물이 튄 종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 종이들 위에는 한자인 듯하면서도 한자가 아닌, 기묘한 형태의 글자들이 살아서 꿈틀대고 있었다.


​"어머니, 보십시오. 이것은 아버지가 주신 소리입니다."


​설총이 내민 종이에는 '이두(吏讀)'의 초기 형태가 적혀 있었다.

백성들이 실생활에서 쓰는 말의 순서대로 한자를 배치하고, 그 사이사이에 신라의 소리를 상징하는 부호를 넣은 것이었다.

요석은 아들의 글자를 하나하나 손으로 짚어보았다.

그것은 원효가 파계를 통해 세상으로 내려갔듯, 고결한 문자가 백성들의 삶 속으로 내려온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요석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총아, 네 아버지는 입으로 세상을 구하려 했으나 너는 글로써 세상을 잇고 있구나. 네 아버지가 담장 너머에서 박을 두드린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그분은 네게 장단을 가르쳐주러 오셨던 게야. 네가 그 장단에 맞춰 춤추듯 글을 쓸 수 있게 말이다."


​요석은 아들을 품에 안았다.

그녀가 원효를 위해 지켰던 정조와 기다림은 헛되지 않았다.

그녀의 인고는 아들의 학문적 열정으로 꽃피어, 신라라는 나라의 정신적 기둥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그날 이후 설총의 공부는 더 이상 고립된 독백이 아니었다.

그는 매일 아침 담장 밑에 나가 앉아 소리를 기다렸다.

비록 아버지가 매일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설총은 이제 바람 소리에서도, 빗소리에서도 아버지의 박 소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아버지가 계신 곳은 저잣거리이고, 내가 있는 곳은 이 서고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이 글자 속에서 만납니다."


​설총은 아버지가 저잣거리에서 부르던 노래 가사들을 이두로 옮겨 적기 시작했다.


"모든 것에 걸림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生死)를 벗어나리라."


그 거창한 문장이 신라의 투박한 소리로 적혔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어려운 불교 철학이 아니라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한 위로가 되었다.
​요석궁의 담장은 여전히 높았다.

그러나 설총에게 그 담장은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리를 공명 시키는 거대한 악기였고, 아버지가 남긴 사랑을 숙성시키는 항아리였다. 원효가 남기고 간 박 소리는 설총의 붓끝에서 천 년을 버틸 문장의 씨앗이 되어 신라의 대지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어느덧 서라벌의 하늘 위로 둥근달이 떠올랐다.

그 달빛은 요석궁의 담장 안팎을 차별 없이 비추었고, 설총은 그 빛을 받아 새로운 신라의 소리, 즉 백성의 마음을 담은 문장을 한 획 한 획 정성껏 그어나갔다.

그것은 사랑이 문명이 되는 장엄한 기록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