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금지된 서고에서 만난 아버지의 문장

닫힌 문 뒤에 숨겨진 진실, 아들의 눈으로 읽는 원효의 고독

by 현루

​청년 설총의 학문은 날로 깊어갔으나, 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어머니 요석이 가르쳐준 경전과 그동안 스스로 익힌 유교의 도리는 정갈하고 반듯했으나, 어딘가 모르게 살아있는 인간의 뜨거운 피가 느껴지지 않았다.

설총은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반쪽의 피, 즉 광기 어린 천재이자 성자였던 아버지 원효의 사상이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요석궁의 서고에는 원효의 저서가 단 한 권도 비치되어 있지 않았다.

원효의 사상은 이미 승단에서 이단으로 몰리거나, 왕실에서조차 너무도 파격적이라 하여 함부로 들추지 않는 금기(禁忌)였기 때문이었다.
​어느 비가 내리는 오후, 설총은 평소 엄하게 닫혀 있던 요석궁 북쪽 끝의 별채로 향했다.

그곳은 무열왕 김춘추가 요석을 위해 마련해 준 비밀스러운 서고로, 왕실의 비기(秘記)와 금서들이 보관된 곳이었다.

평소 요석은 "그곳은 아직 네가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운 책들이 있단다"라며 설총의 출입을 금해왔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 닫힌 문이 설총에게는 이 세상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유일한 통로처럼 보였다.
​설총은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먼지 냄새와 오래된 종이의 향이 쏟아져 나왔다.

어둑한 방 안에는 수천 권의 죽간과 비단 두루마리가 가득했다.

설총은 등불을 밝히고 서가 깊숙한 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서가 가장 구석, 붉은 비단으로 겹겹이 싸인 작은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상자 겉면에는 '금성(金城) 외 유포 금지'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설총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낡았지만 정갈한 필체로 적힌 두루마리가 들어 있었다.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설총은 심장이 멈추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부처는 법당에 갇힌 미라가 아니요, 중생의 눈물 속에 살아있는 숨결이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 원효의 저서,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의 초고였다.

​설총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탐하듯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지금까지 읽었던 그 어떤 성현의 말씀보다도 글자는 날카롭고 강렬했다.

아버지는 문자로 논리를 쌓는 것이 아니라, 문자로 세상의 모든 벽을 허물고 있었다.

원효의 문장은 마치 살아서 꿈틀대는 용처럼 종이 위를 누비며 설총의 고정관념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높은 것과 낮은 것,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이 둘이 아니거늘, 어찌하여 너희는 담장을 쌓고 서로를 적이라 부르는가. 진리는 금빛 보좌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장통의 썩은 생선 머리 위에도, 문둥이의 고름 섞인 상처 위에도 평등하게 내려앉는다.'


​글자 하나하나가 마치 아버지가 직접 귓가에 대고 호통을 치는 듯했다.

설총은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가 왜 저잣거리에서 춤을 췄는지, 왜 공주인 어머니와의 인연을 통해 스스로 시궁창으로 내려왔는지, 그 처절한 고독과 자비가 문장 사이사이에 피 냄새처럼 배어 있었다.

원효는 단순히 계율을 어긴 중이 아니었다.

그는 신라라는 좁은 틀 속에 갇힌 부처를 구출하여 만백성의 가슴속으로 해방시킨 혁명가였다.
​설총은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원효의 문장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버지는 글 속에서 끊임없이 '화쟁(和諍)'을 외치고 있었다.

서로 다른 소리가 모여 하나의 장단을 이루듯, 이 세상의 모든 대립은 결국 하나의 거대한 마음(一心)으로 돌아간다는 그 논리는 설총이 고민하던 '이두'의 철학적 기반이 되어주었다.

​"결국 아버지는 소리로써 세상을 하나로 묶으려 하셨구나."


​설총은 아버지가 남긴 문장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차가운 종이였으나, 그 속에서 맥박이 느껴지는 듯했다.

아버지가 쓴 한자는 기존의 방식과는 달랐다.

매우 어렵고 깊은 철학적 용어들을 사용하면서도, 그 비유만큼은 저잣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을 빌려오고 있었다.

소리와 뜻이 따로 놀지 않고 하나로 어우러지는 기적 같은 문장이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나직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설총이 놀라 돌아보니, 어머니 요석이 등불을 든 채 문가에 서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질책 대신 깊은 슬픔과 함께 어떤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결국 보았구나, 네 아버지의 진실을."


​요석은 아들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녀는 붉은 비단 상자를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내가 너에게 이 책들을 보여주지 않은 것은, 네가 아버지의 그림자에 먹혀버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네 아버지는 너무도 거대한 빛이라, 그 곁에 서면 웬만한 사람들은 자신의 빛을 잃고 어둠 속에 갇히기 마련이지. 하지만 총아, 너는 이제 그 빛을 마주할 만큼 자랐구나."


​요석은 설총의 젖은 뺨을 닦아주었다.


"이 글들은 네 아버지가 요석궁을 떠나기 직전, 나에게 마지막으로 맡긴 마음이다. '우리 아이가 글을 읽을 줄 알게 되면, 그때 이 마음을 전해주시오'라고 하셨지. 그는 너에게 재산이나 권력을 남기지 않았다. 대신 이 세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남긴 것이다."

​설총은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어머니, 저는 이제 알겠습니다. 사람들이 아버지를 욕했던 것은 아버지가 틀려서가 아니라, 그들이 감당하기엔 아버지의 진실이 너무도 눈부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스스로를 파괴함으로써 더 큰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저 또한 이제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저 또한 이 한자의 견고한 성벽을 파괴하여 백성들의 소리를 담아내겠습니다."


​요석은 아들의 결연한 의지에 미소 지었다.

그녀는 원효가 남긴 그 금서들이 아들의 손에서 새로운 문명으로 피어날 것임을 예감했다.

원효의 사상이 이론(理論)이었다면, 설총의 이두는 그 이론을 현실로 구현하는 도구(道具)였다. 부자가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하나의 목적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날 밤, 설총은 서고를 떠나지 않고 원효의 원고 옆에 자신의 연습장을 펼쳤다.

아버지가 쓴 어려운 불교 용어들을 하나씩 이두로 풀어서 적어보기 시작했다.
'일심(一心)'이라는 추상적인 단어가 '한 마음'이라는 정겨운 신라의 소리로 바뀌어 적혔을 때, 설총은 전율했다.

이것은 단순히 글자를 바꾸는 작업이 아니었다. 죽어있던 문장에 생명을 불어넣고, 높은 곳에 있던 진리를 낮은 곳의 백성들에게 배달하는 신성한 의식이었다.

​비가 그친 새벽, 요석궁의 서고 위로 맑은 샛별이 떠올랐다.

설총은 밤새 쓴 원고를 품에 안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그에게 요석궁의 담장은 더 이상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지혜를 축적하고 다듬는 보루였으며, 밖으로 나아가기 전 힘을 기르는 둥지였다.


​"아버지, 당신의 문장은 저에게 길이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그 길 위에 우리 백성들의 소리를 꽃피우겠습니다."


​설총은 담장 너머를 향해 나직이 읊조렸다. 대답하듯 새벽바람이 나뭇잎을 흔들고 지나갔다. 저 멀리 시장통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잠을 깨우는 이른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원효가 두드리던 박 소리처럼 설총의 가슴을 울렸다.
​요석은 멀리서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기도를 올렸다.

한 남자를 사랑했던 여인으로서의 고통은 이제 한 시대의 스승을 길러낸 어머니의 자부심으로 승화되고 있었다.

원효와 요석, 그리고 설총. 세 사람의 운명은 이제 '파계'라는 이름의 상처를 넘어, 이 세상을 밝히는 가장 찬란한 등불로 타오르고 있었다.

금지된 서고에서 시작된 아들의 각성은 신라 천 년의 문장을 여는 위대한 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