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의 달빛 아래 털어놓은 가슴속 응어리와 진정한 해방
서라벌의 가을은 깊어가는 달빛만큼이나 처연했다.
요석궁의 뜰에 심어진 단풍나무들이 붉은 눈물을 뚝뚝 흘리듯 낙엽을 떨어뜨리고, 밤공기는 살갗을 파고드는 서늘함을 머금기 시작했다.
청년이 된 설총이 서고에서 학문에 몰두하는 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올 때, 요석은 홀로 툇마루에 앉아 깊어가는 밤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오래전 원효가 남기고 간 낡은 가사 조각이 쥐여 있었다.
세월의 풍파에 색이 바래고 올이 풀렸지만, 그 천 조각에는 여전히 그날 밤의 뜨거웠던 숨결이 배어 있는 듯했다.
요석은 문득 거울을 보았다.
눈가에는 세월의 훈장 같은 잔주름이 잡혔고, 고왔던 피부는 마른 꽃잎처럼 서글픈 빛을 띠고 있었다.
그녀는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았다.
원효가 떠난 뒤, 그녀의 삶은 기다림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지조 있는 여인이라 칭송하거나, 혹은 파계승을 잊지 못하는 가련한 여인이라 비웃었다.
하지만 요석에게 그 시간은 소유하지 못한 연인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자신을 찾아가는 고통스러운 수행의 시간이었다.
"어머니, 아직 주무시지 않으셨습니까?"
어느새 다가왔는지 설총이 곁에 앉았다.
이제는 어머니보다 한 뼘이나 더 커진 아들의 그림자가 요석의 어깨를 든든하게 감싸 안았다. 설총의 눈에는 아버지를 닮은 지혜와 어머니를 닮은 자애로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요석은 아들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이제는 숨기지 않아도 될, 아니 반드시 들려주어야 할 이야기가 그녀의 입술 끝에서 맴돌았다.
"총아, 너는 내가 네 아버지를 원망한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그를 소유하지 못해 매일 밤 눈물로 지새운다고 믿느냐?"
요석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설총은 대답 대신 어머니의 깊은 눈을 응시했다.
요석은 나직이 미소 지으며 먼 하늘의 달을 보았다.
"나도 처음에는 원망했단다. 왜 나를 이 넓은 궁궐에 홀로 남겨두고 떠났는지, 왜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의 책임보다 저잣거리의 광대로서의 삶을 택했는지 밤잠을 설쳤지. 내가 준 사랑이 그가 가려는 길보다 가벼웠던 것일까 하고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했단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네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내 곁에 묶어두는 밧줄이 아니라, 그가 가장 그답게 살 수 있도록 놓아주는 강물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요석의 고백은 잔잔했지만 힘이 있었다.
그것은 수십 년간 고독이라는 맷돌에 마음을 갈아 만든 진실이었다.
"네 아버지는 바람 같은 사람이었다. 바람을 방 안에 가두면 그것은 더 이상 바람이 아니라 고인 공기가 되어 썩어버리지. 나는 그를 사랑했기에 그를 보내주어야 했단다. 그가 온 세상을 떠돌며 만백성의 가슴속으로 불어 들어갈 때, 비로소 나의 사랑도 완성되는 것이었어. 내가 여기서 담장을 지키고 있었기에 그는 마음 놓고 담장 밖을 떠돌 수 있었던 게지. 우리의 사랑은 단절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긴 끈으로 이어진 하나의 호흡이었단다."
설총은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며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지금까지 아버지가 자신들을 '버렸다'라고 생각하며,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 더욱 학문에 매달려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의 고백은 그 결핍을 '희생'과 '공유'라는 숭고한 가치로 바꾸어 놓았다.
"어머니, 그렇다면 아버지가 저잣거리에서 춤추는 것도, 어머니가 이곳에서 저를 키우시는 것도 모두 같은 목적을 향한 길이었습니까?"
"그렇단다. 사랑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하지 않더냐. 네 아버지는 입으로 진리를 설하고, 나는 너라는 생명을 통해 그 진리를 현실로 빚어냈다. 우리는 비록 몸은 떨어져 있었으나, 이 세상이라는 커다란 도량(道場) 안에서 함께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지. 소유하려 했다면 우리는 서로의 무게에 짓눌려 파멸했을 것이다. 하지만 흐르게 했기에, 우리의 사랑은 너라는 결실을 맺고 신라의 새로운 문장을 잉태할 수 있었던 거야."
요석은 쥐고 있던 가사 조각을 설총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것은 네 아버지가 남긴 유산이자, 내가 지켜온 신의(信義)다. 사랑은 소유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끝까지 책임지는 자의 것이란다. 나는 공주라는 이름을 버리고 너의 어머니가 됨으로써, 그리고 원효의 여인이 됨으로써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자유를 얻었단다."
그날 밤, 요석은 비로소 가슴속 깊은 곳에 맺혀 있던 응어리를 다 풀어낸 듯 평온한 얼굴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녀의 고백은 설총에게 거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설총은 이제 단순히 지식을 쌓는 학자가 아니라, 부모님이 온몸으로 실천한 '사랑과 자비'의 정신을 어떻게 문자로 구현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기다림으로 사랑을 증명하셨고, 아버지는 떠남으로 사랑을 완성하셨다.
그렇다면 나는 기록함으로써 그 사랑을 영원하게 하리라.'
설총은 다시 붓을 들었다.
이제 그의 붓질은 이전보다 훨씬 부드럽고 유연해졌다.
한자의 딱딱한 획들 사이로 신라 백성들의 애달픈 소리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소유하려 하지 않고 흐르게 하는 사랑의 이치가, 주어와 술어 사이를 잇는 이두의 조사(助詞)가 되어 문장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요석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원효와 함께 요석궁의 뜰을 거닐고 있었다.
원효는 그녀에게 꽃 한 송이를 건네며 말했다.
"꽃은 꺾어 품에 안을 때 시들지만, 대지에 머물게 할 때 영원히 향기를 전하는 법이라오."
꿈속의 요석은 활짝 웃으며 그 꽃을 바람에 날려 보냈다.
꽃잎은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 가난한 이들의 머리 위로, 병든 이들의 가슴 위로 눈처럼 내려앉았다.
다음 날 아침, 요석궁을 비추는 햇살은 유난히 맑았다.
요석은 정갈하게 머리를 빗고 아침 공양을 준비했다.
그녀의 뒷모습에서는 더 이상 고독한 과부의 그림자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온 세상을 품은 대지의 어머니와 같은 풍모를 풍기고 있었다.
설총은 마당으로 나와 어머니에게 깊은 절을 올렸다.
"어머니, 이제 알겠습니다. 제가 써 내려갈 문장들은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누신 그 넓은 사랑의 기록입니다.
이 소리가 담장을 넘어 모든 백성의 가슴에 닿을 때까지 멈추지 않겠습니다."
요석은 대견한 듯 아들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래, 사랑은 가두는 것이 아니라 흐르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마라. 네 글자가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막힌 가슴을 뚫어준다면, 그것이 바로 네 아버지가 부르던 무애가이고 내가 바친 평생의 기도란다."
요석궁의 담장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담장은 단절의 벽이 아니었다. 안에서 익은 사랑의 향기가 밖으로 흘러나가고, 밖의 고단한 소리가 안으로 들어와 위로받는 통로가 되었다.
요석과 원효, 두 사람의 사랑은 소유라는 작은 그릇을 깨뜨리고 세상이라는 거대한 바다로 흘러가고 있었다.
가을 하늘 아래, 요석의 고백은 신라의 대지 위에 보이지 않는 평화의 씨앗으로 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