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설총의 방황, 진흙 속에서 연꽃을 꿈꾸다

천재라는 멍에와 핏줄의 함정, 자신만의 길을 묻는 소년

by 현루

​요석궁의 여름이 절정에 다다랐을 무렵, 설총의 내면에는 뜨거운 열기보다 더 치열한 냉기(冷氣)가 감돌고 있었다.

어머니 요석의 고백은 그에게 사랑의 숭고함을 가르쳐주었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은 설총에게 '원효의 아들'이라는 더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설총은 이제 단순히 글을 읽는 학자가 아니었다. 서라벌의 모든 유생은 그를 주목했고, 왕실은 그가 제2의 원효가 되기를, 혹은 원효보다 더 다루기 쉬운 천재가 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설총은 괴로웠다.

그는 아버지가 남긴 《대승기신론소》를 수백 번 필사하면서 깨달았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아버지가 도달한 그 광기 어린 직관과 우주적 통찰에는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버지는 사유의 끝에서 계율을 부수고 나비처럼 날아올랐지만, 자신은 여전히 한자의 획 속에 갇혀 쩔쩔매는 서생일뿐이라는 자괴감이 그를 옥죄었다.


"나는 누구인가. 원효의 파계가 낳은 부산물인가, 아니면 신라의 미래를 짊어진 도구인가. 내가 쓰는 이 글자들은 과연 나의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의 소리를 흉내 내는 잔재에 불과한가."


​설총은 며칠째 붓을 들지 못했다.

서고의 책들은 이제 그에게 지혜의 샘이 아니라 자신을 가두는 창살처럼 느껴졌다.

그는 결국 어머니의 눈을 피해 다시 한번 궁궐의 담장을 넘었다.

이번에는 화려한 시장통이 아니라, 서라벌 외곽의 척박한 늪지대로 향했다.

그곳은 가난한 백성들이 버린 오물과 진흙이 뒤섞여 악취가 진동하는, 세상의 버려진 구석이었다.
​​진흙탕 속에 발을 담근 채, 설총은 멍하니 수면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요석궁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풍경이었다. 그런데 그 더러운 시궁창 한가운데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결한 연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썩은 물을 먹고 자랐음에도 잎사귀에는 흙탕물 한 방울 묻지 않은 채, 연꽃은 오연하게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저 연꽃은 어찌하여 이 더러운 곳에서 저토록 맑게 피어났는가."


​설총은 연꽃을 향해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문득 아버지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진리는 깨끗한 곳에 있지 않고, 가장 더러운 곳에서 피어나는 법이다.'


설총은 무릎을 꿇었다.

자신이 겪는 방황이 바로 이 진흙탕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라는 거대한 산과 어머니라는 깊은 바다 사이에서, 자신은 아직 뿌리조차 내리지 못한 채 부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등 뒤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넝마를 걸친 한 노인이 설총의 곁에서 진흙을 파헤치고 있었다.

노인의 손은 고름과 흙이 뒤섞여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젊은이, 뭘 그리 넋을 놓고 보나? 연꽃이 예뻐서 그런가? 하지만 저 연꽃이 피기 위해 이 밑바닥 진흙이 얼마나 많은 악취를 견뎌냈는지 아는가?"


​노인은 껄껄 웃으며 파낸 진흙 속에서 작은 연근을 꺼내 들었다.


"사람들은 꽃만 보지. 하지만 진짜 생명은 이 시커먼 진흙 속에 박힌 못생긴 뿌리에 있다네.

꽃은 금방 시들지만, 뿌리는 이 더러운 물속에서도 내년을 기약하지. 자네의 고민도 저 꽃처럼 화려해 보이고 싶어 하는 욕심 때문이 아닌가?"

​노인의 말은 설총의 가슴을 송곳처럼 찔렀다. 설총은 자신이 '원효의 아들'로서 멋진 결과물을 내놓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꽃이었을지 모르나, 자신은 그 꽃을 피워내기 위해 진흙 속에 온몸을 던진 뿌리가 되어야 했다.

아버지가 허공으로 날린 소리들을, 자신은 이 투박한 진흙 같은 백성들의 삶 속에 문자로 고정해 뿌리내리게 해야 했다.


​"어르신, 저는 꽃이 되려 했습니다. 아버지의 광채에 가려지지 않는 더 큰 꽃이 되고 싶어 괴로워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알겠습니다. 제가 머물 곳은 저 하늘이 아니라 바로 이 진흙탕 같은 백성들의 가슴 속이라는 것을요."


​설총은 노인에게 깊이 절을 올렸다.

노인은 대답 대신 흙 묻은 손으로 설총의 비단옷을 툭툭 쳤다.


"옷 더러워지는 거 겁내지 마시게. 진흙이 묻어야 진짜 사람이 되는 법이니까."


​설총은 다시 요석궁으로 돌아왔다.

그의 옷은 진흙투성이였고 얼굴에는 땀과 먼지가 가득했다.

요석은 아들의 처참한 몰골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아들의 눈 속에 깃든 방황의 끝을 보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총아, 이제 네가 머물 자리를 찾았느냐?"


​"네, 어머니. 저는 이제 아버지의 그림자를 쫓지 않겠습니다. 아버지는 구름 위에서 번개처럼 세상을 깨우셨지만, 저는 땅 밑에서 지렁이처럼 흙을 일구어 백성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밭을 만들겠습니다. 제 글자는 화려한 향가가 아니라, 밥을 짓고 아이를 키우는 투박한 이두(吏讀)가 될 것입니다."

​그날 밤부터 설총의 서고에서는 예전과 다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더 이상 어려운 불교 철학에 매몰되지 않았다. 대신 시장통에서 들었던 욕설, 농부들이 땅을 갈며 내뱉는 거친 숨소리, 아낙들이 자식을 위해 올리는 소박한 기도의 문장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자의 획을 쪼개고 비틀어 신라의 소리를 담았다.

그것은 세련된 문장은 아니었으나, 읽는 이의 심장을 울리는 생생한 삶의 기록이었다.

설총은 자신이 만드는 이 글자들이 진흙 속의 연근처럼, 비록 모양은 볼품없을지라도 백성들의 삶을 지탱하는 단단한 양식이 되길 바랐다.
​요석은 아들이 밤새 써 내려간 종이들을 보며 생각했다.


'원효는 파계를 통해 부처를 인간에게 데려왔고, 설총은 방황을 통해 문자를 백성에게 가져다주었구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잉태된 생명이, 이제 스스로의 고통을 자양분 삼아 신라라는 나라의 실핏줄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설총은 이제 더 이상 아버지가 두렵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넘어야 할 벽이 아니라, 자신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거름이 되어준 거대한 숲이었다.

그는 진흙 속에서 연꽃을 꿈꾸는 대신, 진흙 그 자체가 되어 연꽃을 지탱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설총이 찾은 자신만의 '화쟁(和諍)'이었고, 요석이 지켜온 사랑의 진정한 완성무대였다.

​방황은 끝났으나 길은 이제 시작이었다.

설총은 붓을 꽉 쥐었다.

붓끝에는 이제 왕실의 위엄이 아니라 백성들의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아버지는 소리로 세상을 깨우셨습니다. 저는 글로써 이 세상을 잇겠습니다. 이것이 제가 당신께 드리는 첫 번째 대답입니다."


​설총은 창밖의 달을 향해 나직이 선언했다.

달빛은 진흙탕 속의 연꽃과 요석궁의 청년을 공평하게 비추고 있었다.

요석은 문 밖에서 아들의 붓 가는 소리를 들으며 비로소 깊은 잠에 들 수 있었다.

아들은 이제 누군가의 아들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가진 한 명의 학자로 우뚝 서 있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난 연꽃보다 더 강인한 뿌리가 신라의 대지를 뚫고 자라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