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말 없는 문장으로 주고받은 확인

문천교 위의 재회, 눈빛으로 나눈 부정(父情)

by 현루

모픽 웹소설 플랫폼에 브런치 스토리에서 멤버십으로 볼 수 없었던 1화와 2화가 오늘부터 게시 중에 있습니다.

​서라벌의 가을이 무르익어 온 산천이 붉은 비단을 두른 듯 타오르던 날이었다.

요석궁의 담장 안에서만 자라온 설총은 이제 스무 살 청년의 늠름한 기상을 갖추었다.

그의 어깨는 넓어졌고, 붓을 쥔 손가락엔 굳은살이 박혀 학문적 성취를 증명하고 있었다.

요석은 이제 아들을 더 이상 가두어둘 수 없음을 직감했다.

아들의 지혜는 이미 요석궁의 담장을 넘어 세상의 소리를 갈구하고 있었다.


"총아, 오늘 문천교를 건너 황룡사로 가거라. 그곳에 네가 그토록 찾던 문장의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요석은 아들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문천교. 그곳은 20여 년 전, 원효가 요석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물에 빠졌던 운명적인 장소였다. 설총은 어머니의 눈빛에서 형언할 수 없는 비장함을 읽어내고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설총이 요석궁의 문을 나서 길을 걷기 시작하자, 서라벌의 공기는 그를 환영하듯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시장통의 소란함, 말들의 울음소리, 사람들의 땀 냄새. 그 모든 것이 설총에게는 신선한 자극이었다. 그는 문천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리 아래로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고, 수양버들은 가을바람에 몸을 맡긴 채 흔들리고 있었다.

​다리 중간쯤 이르렀을 때, 설총의 발걸음이

돌덩이라도 얹은 듯 무거워졌다.

다리 건너편에서 한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해진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고, 허리춤에는 낡은 바가지를 차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자라 엉켜 있었으나, 그 사이로 드러난 눈빛만큼은 구름을 뚫고 나온 태양처럼 형형했다.
​설총은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단 한 번도 가까이서 본 적 없는 얼굴이었지만, 피는 속일 수 없었다.

눈앞의 사내는 자신의 거울이었다.

아버지를 닮은 턱선, 아버지를 닮은 콧날,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세상 전체를 꿰뚫어 보는 듯한 그 서늘하고도 따뜻한 눈동자.​원효였다.
​원효 역시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문천교의 차가운 돌바닥과 흐르는 강물 소리만이 존재했다.

원효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갓 태어난 설총을 눈보라 속에서 축복하며 눈물을 흘렸던 그 밤 이후, 처음으로 마주하는 혈육이었다. 원효의 입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그것은 기쁨이자, 미안함이며, 또한 대견함의 표현이었다.

​침묵은 길었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수만 권의 경전보다 더 깊은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설총은 아버지를 향해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려야 할지, 아니면 자신을 버린 원망을 쏟아내야 할지 갈등했다.

하지만 원효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그 모든 인위적인 감정은 덧없음을 깨달았다.
​원효는 천천히 설총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품 안에서 낡은 종이 한 장을 꺼내 설총의 발 앞에 놓았다.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작은 돌멩이 하나를 그 위에 얹어두고, 원효는 다시 고개를 들어 아들을 보았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말할 필요가 없었다.
​원효는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멀어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설총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버지가 두고 간 종이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그 종이에는 원효의 거친 필체로 단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무애(無碍)라 함은, 담장 안의 달빛이 담장 밖의 어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니라.'

​설총은 그 문장을 가슴에 품고 다리 위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인가(印可)였다. 요석궁에 갇혀 지내며 신분의 고뇌에 빠져 있던 아들에게, 네가 머무는 곳이 어디든 마음의 걸림이 없다면 그곳이 바로 진리의 중심이라는 가르침을 전한 것이었다.
​설총은 비로소 깨달았다.

아버지는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넓은 세상을 가슴에 품을 수 있도록 스스로 거리가 되어주었음을. 아버지가 걷는 저 먼지 나는 길바닥과 자신이 머무는 화려한 요석궁은 본래 하나였다.

단지 사람들의 분별심이 담장을 쌓고 계급을 나눈 것뿐이었다.


​"아버지, 저는 이제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소리가 저의 문장이 되고, 저의 문장이 백성들의 소리가 되는 날, 우리는 이 문천교 위에서가 아니라 서로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만날 것입니다."


​설총은 아버지가 사라진 지평선을 향해 깊이 머리를 숙였다.

그의 눈물은 문천교 아래 흐르는 강물에 떨어져 신라의 대지로 흘러 들어갔다.

그것은 한 청년이 소년의 껍질을 벗고, 한 시대의 학자로 거듭나는 장엄한 성인식이었다.

​요석궁으로 돌아온 설총의 안색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맑아져 있었다.

요석은 아들의 손에 쥐어진 낡은 종이를 보고 모든 것을 짐작했다.

그녀는 아들을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만났느냐?"


​"네, 어머니.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제 앞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제 마음속에,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모든 곳에 아버지가 계심을 보고 왔습니다."


​요석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20년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원효는 파계를 통해 자유를 얻었고, 요석은 인고를 통해 사랑을 지켰으며, 설총은 그 둘의 만남을 통해 지혜를 완성했다.
​그날 밤, 설총은 서고에 앉아 아버지가 준 문장을 이두로 옮겨 적었다.


'담 아래 비췬 달이, 담 밧그 어드믑 부끄러 아니 하노라.'


신라의 투박한 소리로 옮겨진 그 글귀는 원효의 고독과 요석의 눈물, 그리고 설총의 각성을 모두 담아내고 있었다.
​문천교 위의 재회는 짧았으나 그 울림은 천 년을 갈 서막이었다.

이제 설총의 붓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가 준 그 찰나의 눈빛을 자양분 삼아, 백성들의 입을 열어줄 위대한 문명의 설계를 시작하고 있었다.

요석궁의 밤은 깊어갔지만, 그 안에서 타오르는 등불은 신라의 새로운 새벽을 예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