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천교 위의 재회, 눈빛으로 나눈 부정(父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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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의 가을이 무르익어 온 산천이 붉은 비단을 두른 듯 타오르던 날이었다.
요석궁의 담장 안에서만 자라온 설총은 이제 스무 살 청년의 늠름한 기상을 갖추었다.
그의 어깨는 넓어졌고, 붓을 쥔 손가락엔 굳은살이 박혀 학문적 성취를 증명하고 있었다.
요석은 이제 아들을 더 이상 가두어둘 수 없음을 직감했다.
아들의 지혜는 이미 요석궁의 담장을 넘어 세상의 소리를 갈구하고 있었다.
"총아, 오늘 문천교를 건너 황룡사로 가거라. 그곳에 네가 그토록 찾던 문장의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요석은 아들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문천교. 그곳은 20여 년 전, 원효가 요석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물에 빠졌던 운명적인 장소였다. 설총은 어머니의 눈빛에서 형언할 수 없는 비장함을 읽어내고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설총이 요석궁의 문을 나서 길을 걷기 시작하자, 서라벌의 공기는 그를 환영하듯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시장통의 소란함, 말들의 울음소리, 사람들의 땀 냄새. 그 모든 것이 설총에게는 신선한 자극이었다. 그는 문천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리 아래로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고, 수양버들은 가을바람에 몸을 맡긴 채 흔들리고 있었다.
다리 중간쯤 이르렀을 때, 설총의 발걸음이
돌덩이라도 얹은 듯 무거워졌다.
다리 건너편에서 한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해진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고, 허리춤에는 낡은 바가지를 차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자라 엉켜 있었으나, 그 사이로 드러난 눈빛만큼은 구름을 뚫고 나온 태양처럼 형형했다.
설총은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단 한 번도 가까이서 본 적 없는 얼굴이었지만, 피는 속일 수 없었다.
눈앞의 사내는 자신의 거울이었다.
아버지를 닮은 턱선, 아버지를 닮은 콧날,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세상 전체를 꿰뚫어 보는 듯한 그 서늘하고도 따뜻한 눈동자.원효였다.
원효 역시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문천교의 차가운 돌바닥과 흐르는 강물 소리만이 존재했다.
원효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갓 태어난 설총을 눈보라 속에서 축복하며 눈물을 흘렸던 그 밤 이후, 처음으로 마주하는 혈육이었다. 원효의 입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그것은 기쁨이자, 미안함이며, 또한 대견함의 표현이었다.
침묵은 길었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수만 권의 경전보다 더 깊은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설총은 아버지를 향해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려야 할지, 아니면 자신을 버린 원망을 쏟아내야 할지 갈등했다.
하지만 원효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그 모든 인위적인 감정은 덧없음을 깨달았다.
원효는 천천히 설총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품 안에서 낡은 종이 한 장을 꺼내 설총의 발 앞에 놓았다.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작은 돌멩이 하나를 그 위에 얹어두고, 원효는 다시 고개를 들어 아들을 보았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말할 필요가 없었다.
원효는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멀어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설총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버지가 두고 간 종이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그 종이에는 원효의 거친 필체로 단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무애(無碍)라 함은, 담장 안의 달빛이 담장 밖의 어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니라.'
설총은 그 문장을 가슴에 품고 다리 위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인가(印可)였다. 요석궁에 갇혀 지내며 신분의 고뇌에 빠져 있던 아들에게, 네가 머무는 곳이 어디든 마음의 걸림이 없다면 그곳이 바로 진리의 중심이라는 가르침을 전한 것이었다.
설총은 비로소 깨달았다.
아버지는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넓은 세상을 가슴에 품을 수 있도록 스스로 거리가 되어주었음을. 아버지가 걷는 저 먼지 나는 길바닥과 자신이 머무는 화려한 요석궁은 본래 하나였다.
단지 사람들의 분별심이 담장을 쌓고 계급을 나눈 것뿐이었다.
"아버지, 저는 이제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소리가 저의 문장이 되고, 저의 문장이 백성들의 소리가 되는 날, 우리는 이 문천교 위에서가 아니라 서로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만날 것입니다."
설총은 아버지가 사라진 지평선을 향해 깊이 머리를 숙였다.
그의 눈물은 문천교 아래 흐르는 강물에 떨어져 신라의 대지로 흘러 들어갔다.
그것은 한 청년이 소년의 껍질을 벗고, 한 시대의 학자로 거듭나는 장엄한 성인식이었다.
요석궁으로 돌아온 설총의 안색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맑아져 있었다.
요석은 아들의 손에 쥐어진 낡은 종이를 보고 모든 것을 짐작했다.
그녀는 아들을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만났느냐?"
"네, 어머니.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제 앞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제 마음속에,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모든 곳에 아버지가 계심을 보고 왔습니다."
요석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20년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원효는 파계를 통해 자유를 얻었고, 요석은 인고를 통해 사랑을 지켰으며, 설총은 그 둘의 만남을 통해 지혜를 완성했다.
그날 밤, 설총은 서고에 앉아 아버지가 준 문장을 이두로 옮겨 적었다.
'담 아래 비췬 달이, 담 밧그 어드믑 부끄러 아니 하노라.'
신라의 투박한 소리로 옮겨진 그 글귀는 원효의 고독과 요석의 눈물, 그리고 설총의 각성을 모두 담아내고 있었다.
문천교 위의 재회는 짧았으나 그 울림은 천 년을 갈 서막이었다.
이제 설총의 붓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가 준 그 찰나의 눈빛을 자양분 삼아, 백성들의 입을 열어줄 위대한 문명의 설계를 시작하고 있었다.
요석궁의 밤은 깊어갔지만, 그 안에서 타오르는 등불은 신라의 새로운 새벽을 예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