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소성거사의 가르침, 모든 것은 마음이 짓는다

붓끝의 미로에서 만난 노승, 화쟁(和諍)으로 여는 문자의 눈

by 현루

​이두(吏讀)의 기틀을 잡아가던 설총에게 거대한 벽이 찾아왔다.

단순히 소리를 빌려 적는 것을 넘어, 심오한 불교의 진리와 복잡한 통치 철학을 신라의 말로 옮기려니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글자 하나를 선택할 때마다 뜻이 소리를 가리고, 소리를 쫓으면 깊은 철학적 함의가 가벼워졌다. 설총은 며칠 밤을 꼬박 새우며 종이 위에 수천 번 '마음 심(心)' 자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아버지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셨으나, 나는 그 마음이라는 글자 한 자조차 우리 백성의 소리로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구나."


​설총의 방황을 지켜보던 요석은 아들에게 낡은 지팡이 하나를 건네주었다.


"총아, 서고 안의 공기는 이미 네가 다 마셔버린 듯하구나. 이제 밖으로 나가 진짜 마음이 머무는 곳을 찾아보거라. 남산 아래 이름 없는 주막 근처에 '소성거사'라 불리는 이가 나타났다는구나. 그분에게 네가 겪는 문자의 고통을 물어보거라."


​요석의 눈빛은 깊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설총은 어머니의 뜻을 알아차리고 서둘러 채비를 마쳤다.

남산 기슭, 노을이 지는 들판 끝자락에 초라한 주막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는 누더기를 걸친 사내 하나가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무언가를 그리며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있었다. 소성거사, 바로 원효였다.

​설총은 숨을 몰아쉬며 원효의 뒤에 섰다.

원효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흙바닥에 '물 수(水)' 자를 하나 그렸다.


​"이보게, 청년 학자. 이 글자가 무엇으로 보이나?"


​원효의 목소리는 탁했으나 힘이 있었다. 설총은 공손히 대답했다.


"물 수(水) 자입니다. 만물을 적시고 낮은 곳으로 흐르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원효는 껄껄 웃으며 나뭇가지로 그 글자를 뭉개버렸다.

그리고는 옆에 있던 아이의 꾀죄죄한 손을 잡아 흙바닥에 찍게 했다.


"아니다. 이것은 이 아이의 갈증이다. 목마른 아이에게 '물 수' 자를 백 번 써준들 목이 축여지겠느냐? 글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인데, 너는 어찌하여 손가락의 굳은살만 들여다보며 괴로워하느냐."


​설총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해졌다.

원효는 일어서서 설총을 향해 돌아섰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문천교 위에서의 재회보다 훨씬 가깝고 생생한 거리였다.

원효의 눈에는 세월의 풍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으나, 그 깊은 안광은 설총의 가슴속에 숨겨둔 오만과 번뇌를 단번에 꿰뚫어 보고 있었다.


​"네가 만드는 이두는 훌륭하다. 하지만 네 마음속에 '나는 백성을 가르치는 고결한 학자다'라는 상(相)이 남아있는 한, 그 글자는 백성의 살갗에 닿지 못하고 허공에 뜰 것이다. 글자가 소리를 담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이 백성의 슬픔을 담아야 한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짓는 것인데, 너는 왜 종이 위에서만 길을 찾느냐."

​원효는 설총을 데리고 주막 옆 냇가로 향했다. 냇가에는 깨진 해골바가지 하나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원효는 그것을 집어 들고 냇물을 한가득 떠서 설총에게 내밀었다.


​"마셔보아라. 이것이 무엇이냐?"


​설총은 주저하다 물을 마셨다.

시원하고 달콤했다.


"맑은 샘물입니다."


​원효는 다시 그 물을 비우고 진흙탕 물을 떠서 내밀었다.


"이것은 무엇이냐?"


​"더러운 흙탕물입니다."


​원효는 해골바가지를 멀리 던져버렸다.


"어리석구나. 해골에 담기면 오물이고, 금잔에 담기면 감로수더냐? 물은 그저 물일 뿐이다.

네가 만드는 글자도 이와 같다. 한자의 모양이 화려한지, 신라의 소리가 투박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글자를 통해 백성의 마음이 서로 통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부처의 말씀이고 성현의 도리다. 너의 '이두'는 글자를 고치는 작업이 아니라, 단절된 마음과 마음 사이에 다리를 놓는 화쟁(和諍)의 수행이어야 한다."


​원효의 가르침은 벼락처럼 설총의 뇌리를 때렸다. 설총은 비로소 자신이 왜 그토록 문자의 형식에 집착했는지 깨달았다.

그는 아버지를 뛰어넘고 싶어 했고, 세련된 체계를 완성해 인정받고 싶어 했다.

하지만 진짜 글자는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거사님, 저는 이제 알겠습니다. 글자는 소리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마음을 나르는 수레라는 것을요. 제가 쓴 글자 하나에 백성 한 명의 한숨이 녹아들 수 있다면, 저는 평생 이 투박한 붓질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설총은 원효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원효는 아들의 등을 다독여주지는 않았지만,

그가 일어설 때 지팡이로 땅을 탁 치며 응원했다.


​"가거라. 가서 네가 본 그 '마음'을 적어라. 모양이 비뚤어져도 좋다. 뜻이 조금 어긋나도 좋다. 신라의 땅 위에서 신라의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글자라면, 그것으로 족하다. 나 원효는 소리로 세상을 깨웠으나, 너 설총은 마음으로 세상을 이어라."


​원효는 다시 노래를 흥얼거리며 노을 속으로 걸어갔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짓는 것, 담장 안이나 담장 밖이나 본래 한 세상인 것을!"


​설총은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제 그의 가슴속에는 더 이상 문자의 미로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백성들의 거친 숨소리와 그들의 애달픈 진심이 거대한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요석궁으로 돌아온 설총은 곧바로 서고로 들어갔다.

그는 예전에 써두었던 복잡하고 세련된 초고들을 모두 불태웠다.

연기가 서고 천장을 메웠지만 설총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그는 다시 붓을 들었다.

이제 그의 붓끝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가장 단순하고 명료한 글자들을 골라 신라의 말에 붙였다.

'슬프다'는 말을 적기 위해 수천 개의 한자를 뒤지는 대신, 백성들이 땅을 치며 내뱉는 '애(哀)'와 '다(多)'를 결합해 그 울림을 그대로 재현했다.

그것은 학자의 문장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의 호흡이었다.
​요석은 문틈으로 아들의 붓 소리를 들었다.

예전의 붓 소리가 고뇌하는 칼날 같았다면,

지금의 소리는 대지를 적시는 봄비처럼 부드럽고 따스했다.

그녀는 원효가 아들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직감했다.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세상을 품는 거대한 '마음'이었다.


​"총아, 이제야 네가 진짜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구나. 파계의 끝에서 자비를 찾은 이와, 방황의 끝에서 진심을 찾은 이. 너희 부자는 그렇게 서로 다른 길을 걸어 결국 한 곳에서 만나는구나."


​요석은 달빛 아래에서 조용히 합장했다.

설총의 이두는 이제 단순한 문자 체계를 넘어, 신라라는 거대한 공동체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화쟁의 도구로 거듭나고 있었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짓는다는 그 오래된 진리가, 이제 청년 설총의 붓끝을 통해 천 년의 문장으로 기록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