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자루 없는 도끼, 서라벌을 흔들다

무너진 금기와 분노하는 서라벌 ​

by 현루

​원효가 요석궁의 육중한 문을 열고 새벽안갯속으로 사라진 그날 아침, 서라벌은 건국 이래 전례 없는 거대한 충격에 휩싸였다.

신라 최고의 고승이자 왕실의 두터운 신망을 받던 원효가 요석 공주와 사흘 밤낮을 함께 보냈다는 소식은 들불보다 빠르게 금성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그것은 단순히 남녀의 정사를 넘어, 성(聖)과 속(俗)의 경계가 무너진 사건이었으며, 엄격한 골품제와 불교적 계율로 유지되던 신라 사회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조정의 대신들은 벌떼처럼 일어났다.

아침 일찍부터 대궐로 모여든 귀족들은 수염을 파들파들 떨며 왕에게 고했다.


전하, 이것은 왕실의 위엄을 짓밟은 만행이옵니다! 어찌 파계승의 발걸음을 신성한 궁궐에 들이게 하셨나이까! 이는 부처님을 모독하고 유교의 법도를 도륙한 행위이니, 당장 원효를 잡아들여 엄벌에 처하소서!”


​승단의 반응은 더욱 격렬했다.

평소 원효의 파격적인 행보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노승들은 분연히 일어나 그를 종단에서 영구히 제명할 것을 결의했다.


원효는 이제 불제자가 아니다! 법당의 향내보다 여인의 살 냄새를 탐한 자를 어찌 대사라 부를 수 있겠는가! 그는 마구니에게 영혼을 판 괴물일 뿐이다!”


​비난의 화살은 요석 공주에게도 향했다.

서라벌의 아낙들은 빨래터에서, 귀족 부인들은 안방에서 요석을 '부정한 여인'이라 손가락질했다. 어제의 고귀한 공주는 하루아침에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음담패설의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요석궁 주위에는 평소보다 배나 많은 병사가 배치되어 철저한 봉쇄가 시작되었고, 궁 내부의 분위기는 마치 거대한 무덤처럼 가라앉았다.

​폭풍의 중심에 선 요석은 오히려 담담했다.

그녀는 화려한 장신구를 모두 벗어던지고 흰 소복으로 갈아입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응시하며, 그녀는 원효가 남긴 마지막 온기를 가슴속으로 되새겼다.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피를 흘릴지언정,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가 내게 준 것은 수치가 아니라, 비로소 나라는 인간을 깨우는 생명의 빛이었으니.”


요석은 곁에서 눈물을 흘리는 노상궁을 달랬다.


“울지 마라. 서라벌의 비난이 거세질수록 내가 품은 이 인연은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거사님은 이미 이 모든 일을 예견하고 길을 떠나셨다.

나 또한 그분이 닦아놓은 고통의 길을 당당히 걸어갈 것이다.”


​그녀는 궁 안의 서재로 들어가 원효가 머물다 간 자리를 정리했다.

그가 앉았던 방석에는 아직도 거친 삼베 향과 흙내음이 남아있는 듯했다.

요석은 붓을 들어 종이 위에 '무애(無碍)'라는 두 글자를 적었다.

걸림 없는 삶. 그녀는 이제 공주라는 화려한 껍질을 스스로 찢고, 한 사내의 여인이자 장차 태어날 아이의 어머니로서 이 험난한 세상에 홀로 서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원효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증오와 조롱을 온몸으로 맞으며 서라벌의 가장 낮은 곳을 걷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빛나는 가사를 걸치지 않았다.

먹물 들인 낡은 포와 허름한 바가지를 든 그는 스스로를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칭했다.


​“이보시오, 소성거사! 공주와의 하룻밤이 그리도 달콤하던가? 부처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도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느냐!”


​길 가던 이가 돌을 던지자 원효의 이마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원효는 화를 내는 대신 껄껄 웃으며 바가지를 두드렸다.


달콤하고말고! 해골물이 달콤했듯, 공주의 눈물 또한 내게는 감로수였소! 당신들이 보는 것은 파계한 중이지만, 내가 보는 것은 사랑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라오!”


​원효는 시장 한복판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의 춤사위는 기이했고 노래는 파격적이었다. 그는 왕실의 권위나 승단의 규율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비루한 백성들 틈에 섞여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노래했다.


성스러운 법당에 부처는 없다! 굶주린 아이의 울음 속에, 억울한 농부의 한숨 속에 진짜 부처가 살고 있도다! 나는 이제 담장을 허물고 그 부처들을 만나러 가노라!”


​사람들은 그를 미친 중이라며 욕했지만, 그가 부르는 노래의 가사만큼은 가슴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원효는 요석궁에서의 사흘을 통해 깨달은 '인간의 정'이 어떻게 '부처의 자비'로 승화될 수 있는지를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향한 비난을 자양분 삼아, 신라의 굳어버린 사상에 새로운 균열을 내고 있었다.

​사건의 배후였던 무열왕 김춘추는 침묵을 지키며 이 거대한 소용돌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대신들의 거센 항의에도 그는 단 한 마디의 질책도 원효나 요석에게 내리지 않았다.

왕은 알고 있었다.

통일이라는 거업을 앞둔 신라에 필요한 것은 깨끗한 척하는 성자가 아니라, 온갖 더러움을 뒤집어쓰고서도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거인이었다.


​“원효가 드디어 자루를 얻었구나. 이제 그가 깎아낼 기둥이 이 나라를 얼마나 높게 받칠지, 내 두고 보겠다.”


​왕은 비밀리에 요석궁으로 서신을 보냈다. 거기에는 공주의 지위를 박탈한다는 엄벌 대신, 아이를 낳을 때까지 몸조심하라는 아비로서의 따뜻한 배려가 담겨 있었다.

요석은 부왕의 서신을 품에 안고 남몰래 울었다. 비난받는 사랑이었으나, 적어도 누군가는 이 인연의 가치를 알아주고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요석은 매일 밤 탑을 돌며 기도했다.

원효가 걷는 길이 너무 험하지 않기를, 그리고 자신의 배 속에서 자라나는 생명이 세상의 비바람을 견딜 수 있을 만큼 강인해지기를 빌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담장 밖에서는 원효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담장 안에서는 자신이 그 노래를 문장으로 새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서라벌에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얀 눈이 금성의 기와를 덮고 요석궁의 뜰을 하얗게 지워갈 때, 요석은 만삭의 몸으로 창가에 앉았다.

원효가 요석궁을 떠난 지 수개월이 흘렀지만,

그가 남긴 '자루 없는 도끼'의 울림은 여전히 그녀의 귓가를 맴돌았다.


​“거사님, 보십시오. 세상은 우리를 갈라놓으려 하지만, 하얀 눈은 담장 안과 밖을 차별 없이 덮어주고 있습니다. 당신이 말한 화쟁(和諍)의 세상이 이와 같지 않겠습니까.”


​요석은 자신의 배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아이의 발길질이 강해졌다.

그것은 낡은 관습에 갇힌 서라벌을 향해 내딛는 첫 번째 저항의 발소리였다.

원효의 파계가 불러온 폭풍은 이제 파괴가 아닌 창조의 바람으로 변해 신라의 대기를 채우고 있었다.
​가장 고결한 곳에서 태어났으나 가장 낮은 곳을 지향하는 아이.

요석은 그 아이가 장차 신라의 모든 소리를 담아낼 거대한 그릇이 될 것임을 확신했다.

눈 내리는 서라벌의 밤, 요석궁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그 등불은 원효를 향한 사랑의 증표이자, 새로운 시대를 향한 서막이었다.


요석은 비로소 깨달았다.

사랑이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영혼이 만나는 길을 닦는 일임을.

그녀는 이제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