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을 허무는 마지막 가르침, 어머니라는 안식을 넘어 세상으로
서라벌의 들판에 억새가 은빛 물결을 이루며 춤추던 어느 늦가을이었다.
설총은 이제 어엿한 청년의 기상을 넘어, 눈빛 하나만으로도 좌중을 압도하는 학문적 깊이를 지니게 되었다.
그가 정립한 이두(吏讀)는 암암리에 관청의 서리들 사이에서 쓰이기 시작했고, 왕실에서도 그의 재능을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려운 시점이 왔다. 무열왕 김춘추는 손자 설총을 정식으로 조정에 불러들여 국문(國文)과 역사를 정리하는 중책을 맡기고자 서신을 보냈다.
출사(出仕)를 앞둔 전날 밤, 요석궁의 공기는 평소보다 차분하면서도 팽팽했다.
설총은 자신의 짐을 꾸리다 말고 툇마루에 앉아 있는 요석에게 다가갔다.
요석은 달빛 아래에서 하얀 비단실로 아들의 관복 소매를 꿰매고 있었다.
한 땀 한 땀 바늘이 지나갈 때마다 그녀의 평생이 서린 인고의 시간이 실에 감겨 들어가는 듯했다.
"어머니, 내일이면 저는 이 담장을 넘습니다. 요석궁의 그늘을 벗어나 저 거친 조정의 복판으로 나가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홀로 남겨질 어머니 생각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설총이 곁에 앉아 나직이 말하자, 요석은 바느질을 멈추고 아들을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슬픔이 아닌, 잘 익은 가을 열매 같은 단단한 평온함이 서려 있었다.
"총아, 너는 한 번도 내가 홀로 있었다고 생각하느냐? 사람들은 나를 이 궁궐에 갇힌 가련한 공주라 여겼지만, 나는 단 한순간도 고립된 적이 없단다. 내 마음속에는 늘 네 아버지가 춤추고 있었고, 내 눈앞에는 네가 자라고 있었으니,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숲을 거느린 주인이나 다름없었다."
요석은 꿰매던 옷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설총의 손을 잡았다.
"이제 네가 나갈 조정은 이 요석궁보다 백 배는 더 험난한 곳이다. 그곳은 문자가 칼이 되고, 웃음이 독이 되는 곳이지. 사람들은 네 출신을 비웃고, 네가 만든 글자를 업신여길 것이다.
그때마다 너를 지켜주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인고(忍苦)'의 지혜란다."
요석은 잠시 말을 멈추고 먼 남산의 실루엣을 응시했다.
"인고란 무작정 참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겨울의 대지가 봄꽃을 피우기 위해 차가운 눈을 머금고 기다리는 것과 같지. 네 아버지가 파계의 오욕을 뒤집어쓰고도 웃을 수 있었던 것은, 그 고통의 끝에 만백성의 미소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너 또한 사람들의 조롱을 받을 때마다 그것을 네 학문을 단련하는 숫돌로 삼거라. 남이 던지는 돌을 받아 네 집을 짓는 초석으로 삼는 것, 그것이 바로 홀로 서는 자의 기개란다."
설총은 어머니의 말씀을 심장 깊숙이 새겼다.
그는 깨달았다.
어머니가 20년 넘게 이 담장 안을 지킨 것은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아들이 세상의 비바람에 꺾이지 않을 만큼 단단한 뿌리를 내릴 시간을 벌어준 거대한 투쟁이었음을 말이다.
"어머니, 저는 이제 무엇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설총의 물음에 요석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밖의 적이 아니라, 네 마음속에 생길 '오만'이란다. 네가 만든 이두가 세상에 널리 쓰이고 사람들이 너를 칭송할 때, 네가 마치 대단한 창조주라도 된 양 착각하지 마라. 문자는 소리를 담는 그릇일 뿐이고, 그 소리의 주인은 네가 아니라 길바닥의 백성들이다. 네가 홀로 서되, 늘 그들의 발바닥 아래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 그것이 네 아버지가 실천한 '낮은 곳의 부처'이며, 내가 너를 위해 지켜온 '어머니의 마음'이다."
요석은 방 안에서 작은 목함을 하나 꺼내왔다.
그 안에는 투박한 빗질이 된 빗 하나와 거울 하나가 들어 있었다.
"이 빗으로 매일 아침 네 마음의 엉킴을 정돈하고, 이 거울로 네 눈빛이 흐려지지 않았는지 살피거라. 거울 속에 비친 네 얼굴에서 아버지의 자비와 나의 인고가 함께 보인다면, 너는 어디에 있든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 요석궁의 담장은 허물어졌다. 네가 걷는 모든 길이 이제부터는 너의 궁궐이 될 것이니라."
다음 날 새벽, 요석궁의 육중한 대문이 열렸다. 설총은 짐을 짊어지고 문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는 대문 앞에 서서 어머니 요석에게 마지막으로 큰절을 올렸다.
요석은 대문 안쪽 그늘에 서서 아들의 뒷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대신 아들이 걷는 길 위로 쏟아지는 첫새벽의 햇살을 향해 조용히 합장했다.
설총이 멀어질수록 요석의 가슴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해방감이 밀려왔다.
자식을 세상으로 내보낸다는 것은, 어머니로서의 소임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의 완전한 자립을 의미했다.
그녀는 이제 공주도, 원효의 아내도, 설총의 어머니도 아닌, 오직 자기 자신으로서 이 세상에 남겨진 시간을 마주하고 있었다.
"거사님, 보십시오. 우리 아이가 드디어 자루를 쥐고 숲으로 나갑니다. 이제 저는 저를 묶고 있던 이 마지막 실타래를 놓아주려 합니다."
요석은 정원으로 돌아가 자신이 평생 가꾸어온 연못가를 거닐었다.
아들이 떠난 자리는 허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빈자리는 새로운 기도로 가득 채워졌다. 그녀는 이제 홀로 서는 법을 아들에게 가르치며, 동시에 자신도 진정한 고독의 자유를 배우고 있었다.
설총은 대궐로 향하는 문천교 위에서 잠시 멈춰 섰다.
강물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 물을 바라보는 설총의 눈은 이제 어제의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등 뒤에 남겨진 요석궁의 담장이 자신을 가두던 감옥이 아니라,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 존재했던 거대한 자궁이었음을 감사했다.
"어머니, 저는 이제 혼자가 아닙니다.
당신이 가르쳐준 인고의 지혜가 제 혈관 속에 흐르고 있고, 아버지가 남긴 무애의 노래가 제 붓끝에 머물러 있습니다. 저는 이제 가장 화려한 곳에서 가장 낮은 자의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설총은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서라벌의 아침은 눈부시게 밝아오고 있었고, 요석궁의 뜰에는 아들이 떠난 자리에 늦가을의 서리꽃이 찬란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요석은 다시 바늘을 들었다.
이번에는 아들의 옷이 아니라, 이 세상의 상처를 꿰맬 보이지 않는 기도의 비단을 짜기 시작했다. 모자의 이별은 끝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장소에서 하나의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장엄한 동행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