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원효의 구도길, 낮은 곳으로 임하는 부처

금색 보좌를 버리고 시궁창을 택한 성자, 누더기 속에 감춘 지혜

by 현루

​서라벌의 화려한 금빛 기와들이 노을에 젖어들 무렵, 성 밖 외딴 만석동의 토굴 앞에는 늙은 비렁뱅이들과 문둥병 환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들의 중심에는 해진 누더기를 걸치고, 머리에는 박으로 만든 기괴한 탈을 쓴 사내가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미친 중'이라 부르기도 하고, '소성거사'라 부르기도 했으나, 정작 본인은 그 어떤 이름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는 오직 눈앞에 있는 이들의 고름 섞인 상처와 배고픈 신음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원효였다.
​요석궁에서 요석과 설총이 기득권의 화살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을 때, 원효는 전혀 다른 방식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의 전쟁터는 화려한 조정이나 엄숙한 법당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오물이 모여드는 밑바닥이었다. 그는 부처를 경전 속에서 끄집어내어 흙먼지 날리는 장터로 데려왔다.


​"스님, 아니 거사님. 우리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토록 비참하게 살아야 합니까? 부처님은 왜 우리 같은 것들의 기도는 듣지 않으시는 겁니까?"


​다리를 저는 한 거지가 원효의 옷자락을 붙잡고 통곡했다.

원효는 대답 대신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던 박 바가지를 꺼내 냇물을 떠서 그의 입에 물렸다.

그리고는 낮게 읊조렸다.


​"부처가 너를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네가 네 안의 부처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금칠을 한 불상만이 부처가 아니다. 지금 네가 흘리는 그 뜨거운 눈물이 부처의 자비요, 네가 내미는 그 갈라진 손바닥이 보살의 손길이다. 네가 곧 부처인데, 어찌하여 밖에서만 길을 찾느냐."

​원효의 구도(求道)는 파격의 연속이었다.

그는 때로는 술집에 들어가 취객들과 어울려 춤을 췄고, 때로는 기생집 문턱에 앉아 여인들의 슬픈 사연을 들어주었다.

승단에서는 이를 두고 "원효가 마침내 완전히 타락했다"며 침을 뱉었지만, 원효에게는 그 모든 곳이 수행의 도량이었다.
​어느 날은 길가에 쓰러진 병든 소를 보고는 곁에 누워 사흘 밤낮을 함께 앓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비웃었지만, 원효는 그 소의 눈망울 속에서 우주의 고통을 읽어냈다. 그에게는 소나 사람이나, 왕이나 노비나 모두가 '일심(一心)'이라는 거대한 바다에서 치는 물결에 불과했다.


​"세상은 본래 한 집이요, 중생은 본래 한 몸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희는 담장을 쌓고 계급을 나눠 서로를 할퀴느냐. 깨끗함과 더러움이 둘이 아니요, 삶과 죽음이 본래 하나이거늘!"


​원효는 바가지를 두드리며 노래했다.

그의 노래는 '무애가(無碍歌)'라 불렸다.

가사는 쉬웠으나 그 뜻은 바다보다 깊었다.

글을 모르는 백성들은 그 노래를 따라 부르며 자신들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원효는 높은 곳에 있는 불법을 가장 낮은 곳의 언어로 번역하여 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곧 설총이 하고 있는 이두 작업의 정신적 뿌리이기도 했다.

​어느 깊은 밤, 원효는 홀로 산길을 걷다 우거진 숲 속에서 길을 잃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는 문득 발밑에 무언가 걸리는 것을 느꼈다.

손을 뻗어 확인해 보니 그것은 이름 없는 죽은 자의 해골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소스라치며 도망쳤겠지만, 원효는 가만히 그 해골을 무릎 위에 올리고 명상에 잠겼다.
​수년 전, 무덤에서 마셨던 해골물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때의 깨달음은 머리로 이해한 것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의 깨달음은 온몸의 세포가 공명하는 것이었다.


​"이 해골의 주인도 누군가의 남편이었을 것이고, 누군가의 아비였을 것이다. 사랑을 하고, 욕망을 품고,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결국 흙으로 돌아갔구나. 그렇다면 내가 지금 느끼는 요석에 대한 그리움과 설총에 대한 부정(父情) 또한 이 해골 위에 피어난 안개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원효는 어둠 속에서 홀로 웃었다.

슬픔이 밀려왔으나 그 슬픔은 더 이상 그를 옭아매는 사슬이 아니었다.

그는 사랑을 버린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세상 전체를 품는 법을 배운 것이었다.

요석에 대한 개인적인 정은 만백성을 향한 거대한 자비로 승화되었고, 설총에 대한 아비의 마음은 신라의 모든 아이를 향한 축복으로 확장되었다.

​구도길의 중반에 이르렀을 때, 원효는 신라 국경 근처의 한 마을에서 전염병으로 몰살당하는 백성들을 보았다.

관청에서는 시체를 태우기에 급급했고, 승려들은 전염될까 두려워 마을 입구조차 얼씬하지 않았다. 원효는 망설임 없이 마을로 들어갔다.

그는 시체를 직접 거두어 묻어주고, 살아남은 이들의 발을 씻겨주었다.
​그곳에서 그는 한 청년 승려를 만났다.

도반인 의상의 제자였다.

청년 승려는 원효를 보고 경악했다.


"스님! 어찌하여 이런 더러운 곳에 계십니까?

법당에 앉아 경전을 읽으셔야 할 분이 어찌 송장과 뒹굴고 계신단 말입니까?"


​원효는 흙 묻은 손으로 청년 승려의 가사를 가리켰다.


"네 옷은 깨끗하나 네 마음은 전염병보다 무서운 아만(我慢)에 물들어 있구나. 부처가 어디 있느냐? 저기 썩어가는 시체 속에 있고, 아이를 잃고 통곡하는 어미의 가슴속에 있다. 너는 죽은 종이 위에서 부처를 찾느냐? 나는 살아있는 지옥 속에서 부처를 만나고 있다."


​원효의 사자후에 청년 승려는 무릎을 꿇고 통곡했다.

원효는 그에게 가르침을 주되, 절대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자신의 삶으로, 자신의 비루한 뒷모습으로 진리를 증명할 뿐이었다.

​원효의 소문은 다시 서라벌로 흘러 들어갔다. 요석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원효의 기행과 자비의 이야기를 들으며 남몰래 미소 지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원효가 걷는 그 험난한 길이 결국 자신의 집 마당과 이어져 있음을.

그는 밖에서 벽을 허물고 있었고, 자신은 안에서 그 허물어진 자리에 사랑의 꽃을 심고 있었다.
​원효는 다시 길을 떠났다.

그의 발바닥은 굳은살로 두꺼워졌고, 피부는 태양에 그을려 구릿빛이 되었다.

그는 이제 신라라는 나라의 경계를 넘어, 모든 중생의 마음속에 흐르는 '근원의 강물'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길은 어디에도 없고, 또한 모든 곳에 있다. 내가 걷는 이 한 걸음이 곧 부처의 발자국이요, 내가 내뱉는 이 한숨이 곧 우주의 노래로다."


​원효는 해 저문 언덕에 서서 요석궁이 있는 쪽을 향해 긴 숨을 내쉬었다.

그의 가슴속에는 요석의 얼굴과 설총의 이름이 여전히 별처럼 박혀 있었으나, 그것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를 이 험한 세상 끝까지 걷게 하는 등불이자 에너지였다.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온 성자, 원효의 구도는 그렇게 신라의 대지를 적시는 보이지 않는 비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