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설총의 성인식, 붓으로 깎는 하늘 기둥

금빛 대궐의 차가운 시선과 맞서다, 문자로 세운 신라의 뼈대

by 현루

​서라벌의 심장부, 금성(金城)의 대궐문이 열리고 설총이 발을 내디뎠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은 환영의 꽃다발이 아니라 서늘한 침묵과 경멸 어린 시선이었다.

화려한 관복을 차려입은 진골 귀족들은 요석궁에서 온 이 '파계승의 아들'을 마치 불길한 구경거리 보듯 훑어보았다.

설총은 스무 살의 나이에 국학(國學)의 핵심 요직을 맡으라는 무열왕의 밀명을 받고 온 터였다.


​"저자가 바로 요석 공주가 몰래 키웠다는 그 아이인가? 혈통은 고귀할지 모르나, 그 아비가 누구인지 생각하면 참으로 해괴한 등용이로군."
"붓으로 기둥을 깎겠노라 호언장담했다지?

글자나 몇 자 안다고 나라의 근간을 세울 수 있다 믿다니, 가소롭기 짝이 없네."


​대신들의 비아냥거림은 설총의 귓가를 스쳤으나,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어머니 요석이 준 거울을 아침마다 보며 다짐했다.

비난의 돌이 날아오면 그것을 딛고 올라설 디딤돌로 삼겠노라고.

설총은 왕의 앞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렸다.

무열왕 김춘추는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손자를 내려다보았다.

왕의 눈에는 안타까움과 기대가 교차하고 있었다.


​"설총아, 이제 너의 무대는 요석궁의 서고가 아니라 이 거친 조정이다. 네 아버지는 마음의 벽을 허물었으나, 너는 이 나라의 제도를 세우고 흩어진 백성들의 소리를 하나로 묶어야 한다. 할 수 있겠느냐?"


​설총은 고개를 들어 왕을 직시했다.


"전하, 저는 붓으로 기둥을 깎으러 왔습니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글 모르는 백성들도 그 그늘 아래 쉴 수 있는 거대한 나라의 기둥을 세우겠습니다."

​설총에게 주어진 첫 번째 임무는 삼국 통일 전쟁 이후 어지러워진 토지 대장과 호구 조사 문서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당시의 문서는 어려운 한문으로만 적혀 있어, 관료들이 마음만 먹으면 수치를 조작해 백성들을 수탈하기 일쑤였다.

설총은 이 지점에서 자신의 '이두(吏讀)'를 공식적으로 도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국학의 서리들을 소집했다.


"이제부터 모든 행정 문서는 우리 신라의 소리 순서대로 적는다. 한자의 뜻에 매몰되지 말고, 백성들이 말하는 그대로를 문자로 옮겨라. 조사는 '을(乙)'로, 어미는 '라(羅)'로 통일한다. 누구든 읽으면 즉시 뜻을 알 수 있게 하라."


​서리들은 당황했다.


"나으리, 이것은 천 년의 관습을 깨는 일입니다. 귀족 어르신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설총은 몸소 붓을 들어 문서를 수정해 나갔다.

그의 붓끝은 마치 예리한 칼날처럼 복잡한 한문의 허례허식을 잘라냈고, 그 자리에 백성들의 숨결이 담긴 이두를 채워 넣었다.
​이것은 설총만의 '성인식'이었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진리를 위해 세상의 거대한 관습과 싸울 준비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설총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업에 매달렸다.

그의 관복 소매는 늘 먹물에 젖어 있었고, 그의 집무실 등불은 새벽까지 꺼지지 않았다.

​예상대로 보수적인 귀족 세력의 반발은 거셌다. 각부의 대신들은 "설총이 상스러운 문자로 국격을 떨어뜨리고 있다"며 왕에게 연일 상소를 올렸다. 급기야 조정의 회의 석상에서 설총을 직접 탄핵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설총! 네가 감히 성현의 문자를 더럽히고 왕실의 권위를 훼손하려 드느냐? 네 아비가 계율을 어기더니 너는 문법을 어기는구나!"


​대각간 김유신의 후예를 자처하는 한 귀족이 포효했다.

설총은 그를 향해 차분히 물었다.


"어르신, 글자는 무엇을 위해 존재합니까? 임금의 덕이 백성에게 닿고, 백성의 억울함이 임금에게 닿게 하는 다리가 아닙니까? 지금의 한문은 너무 높아 백성들이 강을 건너다 물에 빠져 죽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위해 튼튼한 징검다리를 놓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어찌 국격을 떨어뜨리는 일입니까? 진정한 국격은 백성이 제 뜻을 펼칠 수 있을 때 세워지는 법입니다."


​설총의 일갈은 편전의 공기를 얼어붙게 했다.

그는 단순히 문자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권력이 된 세상의 모순을 찌르고 있었다.

무열왕은 침묵 끝에 무릎을 탁 쳤다.


"설총의 말이 맞다. 나라의 문자가 백성의 소리를 담지 못한다면 그것은 죽은 글자다. 이제부터 모든 지방 관청의 보고서는 설총이 제안한 방식으로 작성토록 하라."


​왕의 결단은 설총에게 거대한 날개를 달아주었다. 비록 뒤에서는 여전히 그를 '파계승의 자식'이라 욕했지만, 앞에서는 누구도 그의 학문적 성과를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설총은 출사 후 처음으로 얻은 휴가에 요석궁을 찾았다.

요석은 아들의 당당해진 체구와 깊어진 눈매를 보며 말없이 차를 내주었다.


"어머니, 저는 오늘 붓으로 첫 번째 기둥의 밑바탕을 깎았습니다. 사람들이 제게 던진 욕설이 오히려 제 붓을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요석은 아들의 손을 잡았다.

붓을 너무 많이 쥐어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이 애틋했다.


"그래, 총아. 네 아버지는 길바닥에서 춤을 추며 사람들의 가슴을 열었고, 너는 대궐에서 글을 쓰며 사람들의 머리를 열고 있구나. 네가 깎는 그 기둥은 이 요석궁의 담장보다 훨씬 높아야 한다.

온 신라 백성이 그 기둥 아래서 자신들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말이다."


​설총은 어머니의 품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자신이 나아갈 길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그는 이제 단순한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나라의 정신적 골조를 세우는 설계자였다.

아버지가 파격으로 보여준 자유를, 그는 질서와 체계로 완성해 나가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설총은 다시 대궐로 향했다. 돌아가는 길, 문천교 위에서 그는 잠시 멈춰 서서 밤하늘을 보았다.

별들이 쏟아질 듯 빛나고 있었고, 그 빛은 요석궁과 금성을 공평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버지, 당신의 아들이 이제 글자로 세상을 비추려 합니다. 당신이 박을 두드리던 그 장단에 맞춰, 저는 이 땅의 역사를 새로 적겠습니다."


​설총은 허리춤에 찬 붓을 만져보았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작지만 가장 강력한 도끼였다.

그는 이제 그 도끼를 들고 신라라는 거대한 숲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성인식을 마친 청년 설총의 등 뒤로, 요석이 빌어준 달빛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축복하고 있었다. 신라의 새로운 문명은 그렇게 한 청년의 굳은 결심과 묵향 속에서 태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