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낮은 곳에서 쌓아 올린 동행의 기록
우리의 삶은 지면과 맞닿은 아주 얇은 고무창 위에서 위태롭게, 혹은 단단하게 지탱된다.
현관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어두운 신발장, 그 구석에 놓인 낡은 운동화 한 쌍은 단순한 소모품이 아니다.
그것은 나와 세상 사이의 물리적 마찰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닳아간 헌신의 증거이자, 내가 지나온 시간의 궤적을 가장 정직하게 보관하고 있는 침묵의 기록자다.
사유의 시선으로 바라본 낡은 운동화는 '낮아짐의 철학'을 상징한다.
인간의 시선은 늘 높은 곳과 앞을 향하지만,
발은 언제나 차가운 아스팔트와 거친 흙길을 딛고 서 있다.
운동화는 그 낮은 곳에서 발생하는 모든 충격을 대신 흡수하며 나의 보행을 돕는다.
뒤축이 닳고 밑창의 문양이 희미해진 것은, 그만큼 내가 세상과 치열하게 부대끼며 살아왔음을 의미한다.
조화란 이처럼 누군가의, 혹은 무언가의 묵묵한 희생 위에서 성립된다.
내가 똑바로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내 의지의 힘이기도 하지만, 나를 대신해 닳아 없어진 운동화의 고무창이 존재하기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관조의 끝에서 발견하는 운동화의 미학은 '비대칭의 조화'에 있다.
휠체어 위의 삶이든, 두 발로 걷는 삶이든 신발은 저마다의 방식대로 주인의 신체적 특성에 맞춰 변형된다.
좌측 편마비의 흔적이 남은 운동화라면 그 닳음의 각도와 주름의 깊이가 좌우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 비대칭은 결코 결함이 아니다.
그것은 주인이 세상을 살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 흔적이며, 주인과 사물이 서로의 비어있는 공간을 채워가며 맞추어간 최적의 균형이다.
조화는 완벽한 대칭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 모양대로 포개어지는 과정이다.
낡은 운동화의 일그러진 형태야말로 주인의 삶과 가장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결과물인 셈이다.
통찰의 깊이를 더해보면, 이는 '동행의 본질'에 닿아 있다.
진정한 동행은 화려한 수식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며, 비바람이 불거나 뙤약볕이 내리쬐는 날에도 묵묵히 함께 걷는 것이다.
운동화는 주인의 걸음이 느리다고 불평하지 않으며, 주인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험난하다고 해서 발을 빼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필요한 연대 역시 이러한 형태여야 한다.
조건 없이 곁을 내어주고, 상대방의 속도에 맞춰 기꺼이 자신을 깎아내는 것. 운동화의 해진 끈과 먼지 묻은 표면은 그 숭고한 동행의 훈장과도 같다.
우리는 흔히 새 신발의 반짝임에 매혹되지만, 정작 우리를 위로하는 것은 내 발 모양에 익숙해진 낡은 신발이다.
새것은 아직 세상과 화해하지 못해 딱딱하고 거칠지만, 낡은 것은 수만 번의 마찰을 통해 비로소 부드러워졌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이와 같다.
처음 만난 타인은 경계의 대상이지만, 오랜 시간 사유와 경험을 공유하며 서로의 모난 부분을 깎아낸 관계는 그 어떤 것보다 편안한 안식처가 된다.
조화로운 세상은 이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진' 낡은 존재들이 많아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결국 신발장 속의 낡은 운동화는 우리에게 성찰을 요구한다.
나는 지금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닳아 없어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
혹은 누군가의 거친 보폭을 묵묵히 받아내주는 견고한 밑창이 되어주고 있는가.
세상은 화려한 머리들의 대화로 움직이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흙탕물을 뒤집어쓰며 걷는 수많은 발과 그 발을 감싸는 낮은 존재들에 의해 유지된다.
우리의 삶은 오늘도 신발 끈을 묶는 행위로 시작된다.
그것은 세상이라는 무대로 나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무장이자, 타인과 연결되기 위한 정돈이다. 신발장을 닫으며 나는 생각한다.
비록 나의 걸음이 남들과 조금 다를지라도,
이 낡은 운동화는 언제나 나의 가장 충실한 이해자로 남을 것이라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토록 낮은 곳의 헌신을 기억할 때, 우리는 비로소 차별 없는 조화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닳아 없어진 밑창만큼 나의 인격도 둥글게 다듬어지기를, 그리하여 내가 딛는 모든 땅에 평화의 흔적을 남길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