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주방의 행주와 수건

타인의 흔적을 품어 안는 젖은 헌신

by 현루

매일 무언가를 먹고 마시며 생을 지속하는 주방이라는 공간에서,

행주와 수건은 가장 분주하게 움직이지만 가장 낮은 곳에 머무는 존재들이다.

식탁 위에 엎질러진 물기, 그릇에 남은 음식의 잔해, 그리고 손끝에 묻은 젖은 기운을 닦아내는 이 헝겊 조각들은 단순히 위생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타인이 남긴 흔적을 자신의 몸으로 받아내어 지워버리는, 이른바 ‘대속(代贖)의 조화’를 실천하는 사물들이다.
​사유의 시선으로 바라본 행주와 수건은 ‘자신을 적심으로써 타인을 말리는’ 역설적인 희생을 상징한다.

조화로운 세상은 누군가의 빛나는 성취 뒤에서 묵묵히 그 뒷모습을 정리해 주는 손길들에 의해 유지된다.

행주는 식탁의 더러움을 닦아내며 스스로는 얼룩지고 냄새가 나지만, 그 덕분에 우리가 마주 앉는 식탁은 다시금 정갈한 대화의 장으로 회복된다.

조화란 이처럼 아름다운 것들끼리의 결합이 아니라, 지저분하고 젖은 것들을 기꺼이 감싸 안아 정화하는 과정에 그 본질이 있다.

내가 깨끗함을 누리는 순간, 어디선가 나를 대신해 젖고 있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에서 진정한 통찰은 시작된다.
관조의 끝에서 발견하는 이 사물들의 미학은 ‘흡수와 발산’의 리듬에 있다.

수건은 타인의 젖은 손을 감싸 쥐며 물기를 흡수하고, 행주는 바닥의 얼룩을 빨아들인다. 그러나 이들은 머금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물에 씻기고 햇볕에 말려지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품었던 타인의 흔적을 비워내고, 다시 비어있는 상태로 돌아가 다음의 헌신을 준비한다.

우리의 관계 역시 그러해야 한다.

타인의 아픔이나 실수를 내 마음속에 받아들였다면, 그것을 원망으로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용서와 이해라는 볕 아래 말려내어 다시 맑은 상태로 마주하는 조화가 필요하다.
​통찰의 깊이를 더해보면, 이는 ‘경계 없는 포용’에 닿아 있다.

행주는 그것이 비싼 외제 식탁이든 낡은 나무 밥상이든 가리지 않고 제 몸을 던진다.

수건 또한 주인의 손이 거칠든 부드럽든 똑같은 질감으로 다가와 온기를 전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필요한 연대 또한 이와 같아야 한다.

조건이나 대상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닦아내야 할 필요’가 있는 곳에 자신을 내어주는 무차별적인 배려.

휠체어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느끼는 것은, 이러한 무언의 배려들이 모여 비로소 사회라는 커다란 식탁이 평형을 유지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흔히 화려한 장식품에 매혹되지만, 정작 삶이 위태롭고 어지러울 때 손을 뻗는 곳은 주방 구석의 낡은 행주다.

가장 비천해 보이지만 가장 절실한 순간에 필요한 존재.

조화로운 세상은 주인공이 되려는 사람들보다, 기꺼이 조연이 되어 뒷정리를 자처하는 이들에 의해 더욱 견고해진다.

행주의 해진 올과 수건의 낡은 올 사이에는 수만 번의 닦아냄과 헹궈냄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닳아 없어지는 소멸의 과정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자신을 조금씩 깎아내어 세상을 맑게 만드는 숭고한 소진이다.
​결국 주방의 행주와 수건은 우리에게 성찰을 요구한다.

나는 지금 누군가의 젖은 마음을 닦아주는 부드러운 올을 가지고 있는가.

혹은 나의 깨끗함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고만 있지는 않은가.

세상은 빳빳하게 다려진 와이셔츠처럼 매끄러운 이들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물기를 가득 머금어 묵직해진 행주처럼, 타인의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낸 이들의 젖은 어깨 덕분에 우리는 오늘도 쾌적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우리의 삶은 오늘도 무언가를 닦아내며 정돈된다. 주방 한편에 걸린 수건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비록 보잘것없는 존재일지라도 누군가의 젖은 손을 말려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존재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토록 낮은 곳의 헌신을 조화의 중심에 둘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의 얼룩을 비난하지 않고 함께 닦아나가는 따뜻한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젖은 몸을 말리는 햇살처럼, 우리의 사유도 타인의 그늘을 비추는 온기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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