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흐르는 강물은 바다를 잊지 않는다

천 년의 침묵을 깨고 되살아난 세 사람의 노래

by 현루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 신라의 달밤은 고려의 아침이 되었고, 다시 조선의 저녁으로 이어졌다. 서라벌을 호령하던 화려한 궁궐들은 무너져 주춧돌만 남았고, 요석 공주가 아들을 품어 길렀던 요석궁의 붉은 담장도 이제는 흔적조차 찾기 힘든 고즈넉한 빈터가 되었다.

하지만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고 건물이 먼지가 되어 사라진 그 자리에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

세 개의 향기가 여전히 감돌고 있었다.
​먼 훗날, 조선의 어느 유학자가 설총의 사당인 '서악서원'을 찾아 무릎을 꿇었다.

그는 설총이 남긴 이두의 흔적을 더듬으며,

그 투박한 글자 속에 숨겨진 원효의 광기와 요석의 눈물을 읽어냈다.

학자는 종이 위에 이렇게 적었다.


​'원효는 소리로 벽을 허물었고, 설총은 글로써 다리를 놓았으니, 그 중간에서 자신의 몸을 다리 삼아 견뎌낸 이는 바로 요석이었다. 한 가문의 비극이 어찌 이토록 찬란한 문명의 등불이 되었는가.'


​그것은 단순히 한 학자의 감상이 아니었다.

우리 민족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우리 식대로 표현하려 했던 모든 시도의 뿌리에는, 요석궁에서 밤을 지새우며 붓을 깎던 청년 설총의 고독이 서려 있었다.

​원효가 저잣거리에서 두드리던 박 바가지는 이제 박물관의 유물이 되었을지 모르나, 그가 외치던 '일심(一心)'과 '화쟁(和諍)'의 정신은 우리 민족의 심성 속에 깊이 뿌리내렸다.

서로 다른 것을 억지로 합치지 않고, 다름 속에서 조화를 찾는 그 넉넉한 마음은 신라를 넘어 이 세상 모든 갈등을 치유할 유일한 열쇠로 남았다.
​사람들은 이제 원효를 '파계승'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더러운 진흙이 되어 연꽃을 피워낸 성자였으며,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수직으로 낙하한 자비의 화신이었다.

그가 요석과 나누었던 사흘간의 사랑은 음란한 일탈이 아니라, 부처의 가르침을 인간의 온기로 번역하기 위한 신성한 의식이었다.

그 사랑이 없었다면 설총은 없었을 것이고, 설총이 없었다면 우리말의 체계적인 기록 또한 훨씬 늦춰졌을 것이다.

​요석 공주는 역사의 행간 속에 조용히 숨어 있으나, 사실 그녀야말로 이 거대한 서사의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그녀는 원효라는 폭풍우를 가슴에 품었고, 설총이라는 거목을 길러내기 위해 평생을 비바람을 막아주는 담장으로 살았다.

그녀의 인고는 단순한 수동적 기다림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의 이상이 현실에서 꽃 피울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을 거름으로 내어준 가장 능동적인 희생이었다.
​오늘날 서라벌의 옛터를 걷다 보면, 이름 모를 들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귀를 기울이면 그것은 원효의 박 소리 같기도 하고, 설총의 붓 가는 소리 같기도 하며, 요석의 나직한 자장가 소리 같기도 하다.

그들은 이제 하나의 전설이 되어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흐르는 것이며, 지혜는 가두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이다."

​설총이 정립한 이두는 훗날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소중한 밑바름이 되었다.

우리말의 음절과 조사를 문자로 표현하려 했던 설총의 고뇌는 천 년의 시간을 건너 세종의 애민 정신과 만났다.

설총은 죽어서도 자신의 글자를 통해 백성들의 입을 열어주었고, 그들의 슬픔을 기록하게 했다.


​에필로그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한 시대의 위대한 문명은 결코 평탄한 길 위에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파계와 비난, 인고와 방황이라는 치열한 진통 끝에 탄생한 '요석궁의 등불'은 지금도 우리 문학의 심장부에서 따스하게 타오르고 있다.

​이제 요석궁의 문을 닫으려 한다.

하지만 그 문 뒤에 펼쳐졌던 세 사람의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말로 사랑을 고백할 때, 억울함을 호소할 때, 그리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화해의 손을 내밀 때마다 원효와 요석, 설총은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쉴 것이다.
​흐르는 강물은 바다를 잊지 않듯, 우리 문명의 뿌리는 그 뜨거웠던 요석궁의 밤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긴 이야기를 함께해 주신 독자 여러분의 가슴속에도, 원효의 자유와 요석의 사랑, 설총의 지혜가 한 줄기 등불이 되어 머물기를 기원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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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루 작가의 첫 소설이자 마지막 소설입니다.

지금까지 한 회라도 읽어주신 모든 분께 거듭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훗날 이 소설이 브런치스토리에서 제가 없더라도

읽는 분들에게 기억에 남는 소설로 남겨졌으면 합니다. 더 아프기 전에 이미 원고가 완성되어서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건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