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우산

젖음을 나누어 온기를 지키는 둥근 지붕

by 현루

​현관 한편에 비스듬히 세워진 우산을 봅니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의 우산은 그저 자리를 차지하는 길쭉하고 거추장스러운 막대기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하늘에서 회색빛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하면, 우산은 비로소 자신의 몸을 활짝 펴고 존재의 이유를 증명합니다.

우산이 펼쳐지는 순간, 비바람이 몰아치는 거친 세상 속에 작지만 아늑한 '나만의 지붕' 하나가 태어납니다.


​우산의 구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화합의 정교한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중심을 잡고 있는 든든한 대를 중심으로, 수많은 살대가 부채꼴 모양으로 뻗어 나가 천을 팽팽하게 지탱합니다.

이 살대 중 하나만 휘어지거나 부러져도 우산은 온전한 원을 그리지 못하고 한쪽으로 무너져 내립니다.


우리네 삶의 결속도 이와 같습니다.

화려한 겉면을 지탱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안쪽에서 서로의 어깨를 맞대고 버티는 이 작은 살대들의 연대가 있기에, 우리는 거센 폭풍우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산이 지닌 가장 아름다운 사유는 '함께 쓰기'를 할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혼자 쓰기에 넉넉했던 우산 아래 누군가 낯선 이가 들어올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한쪽 어깨가 젖는 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조화란 바로 나의 어깨 한쪽을 빗물에 내어주는 용기에서 시작됩니다.

상대를 우산 안으로 깊숙이 들이기 위해 우산을 그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이는 그 다정한 배려, 그 기울임이야말로 이 세상을 지탱하는 가장 따뜻한 각도입니다.

비록 내 어깨는 차가운 빗방울에 젖어갈지라도, 내 곁의 사람이 보송보송한 온기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 젖음은 희생이 아니라 사랑의 흔적이 됩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비를 맞습니다.

그것은 실패일 수도, 상실일 수도, 혹은 고독일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비를 완전히 멈추게 하는 마법이 아니라, 그 비를 함께 맞아줄 우산 한 자루입니다.

우산은 비를 막아주지만, 빗소리까지 차단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팽팽한 우산 천에 부딪히는 빗소리는 안쪽에 있는 이들에게 리드미컬한 평안을 선물합니다.

고난을 함께 겪으며 그 고통의 소리를 함께 듣는 것, 그리하여 서로의 체온으로 눅눅한 공기를 데우는 것. 그것이 진정한 동행의 모습입니다.
​우산은 비가 그치면 다시 몸을 좁게 접고 조용히 구석으로 물러납니다.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고 다시 긴 침묵 속으로 들어가는 그 뒷모습은 참으로 겸손합니다.

햇살이 내리쬐는 맑은 날에는 아무도 우산을 찾지 않지만, 우산은 서운해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음 비를 기다리며 스스로의 몸을 말리고, 다시 누군가의 지붕이 될 준비를 할 뿐입니다. 빛나는 순간에는 뒤로 물러나고, 모두가 피하고 싶어 하는 어두운 순간에 기꺼이 앞장서서 매를 맞는 그 묵묵한 태도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화합의 자세를 가르쳐줍니다.
가끔 길가에 버려진 살대가 뒤틀린 우산을 봅니다. 그것은 아마도 감당할 수 없는 강풍에 맞서 누군가를 끝까지 지키려다 상처 입은 훈장일 것입니다.

찢어진 천 사이로 비가 새어 들어와도 마지막까지 주인의 머리 위를 지키려 했던 그 고집스러운 헌신을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집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이토록 치열한 우산이었던 적이 있었을까요?

나의 안위보다 타인의 젖음을 더 걱정하며, 온몸이 뒤틀리는 아픔 속에서도 끝까지 펼쳐져 있었던 적이 있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제 비가 개인 거리를 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우산을 접고 다시 환한 햇살 속으로 걸어 나갑니다.

비에 젖었던 우산들이 하나둘 펼쳐져 햇볕에 몸을 말리는 풍경은 마치 각자의 고통을 이겨낸 영혼들이 나누는 평화로운 대화처럼 보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넓은 광장에 수만 개의 우산이 저마다의 색깔로 피어났다 지는 것은, 우리가 서로의 비바람을 외면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오늘 하루, 누군가의 마음 위로 비가 내린다면 기꺼이 나의 마음을 넓게 펴서 우산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내 어깨가 조금 적셔지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서로의 우산이 되어줄 때, 이 축축한 세상은 비로소 향기로운 흙내음을 풍기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변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젖은 신발을 벗고 집으로 돌아와 구석에 세워진 우산을 소중히 매만지며, 내일 또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펼쳐질 그 둥근 마음을 미리 품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