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지우개

허물을 덮어 새 길을 여는 너그러운 마모

by 현루

​연필로 글을 쓰다 보면 필연적으로 잘못된 문장을 적거나 삐뚤어진 선을 긋게 됩니다.

그때 우리 곁에서 묵묵히 기다리던 '지우개'가 등장합니다.

지우개는 참으로 너그러운 물건입니다.

타인의 실수나 과오를 나무라지 않고, 그저 자신의 몸을 문질러 그 흔적을 지워낼 뿐입니다.

하얀 종이 위에 남은 거친 흔적들이 지우개의 몸과 부딪혀 가루로 흩어질 때, 종이는 다시금 무엇이든 적을 수 있는 깨끗한 가능성의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의 화합도 이 지우개의 미학과 닮아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부딪히다 보면 본의 아니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거나 오해의 문장을 적어 내려가곤 합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이 아니라, 지우개 같은 부드러운 포용입니다.

상대의 실수를 들춰내어 박제하기보다, 나의 인내와 이해를 문질러 그 허물을 덮어주는 것. 그렇게 해서 상대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빈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조화의 시작입니다.
​지우개가 흔적을 지우는 과정은 결코 공짜가 아닙니다.

지우개는 타인의 잘못을 지우기 위해 반드시 자신의 살을 깎아내야 합니다.

문지르면 문지를수록 지우개는 작아지고, 그 깎여 나간 살점들은 검은 가루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조화라는 것은 이처럼 나의 에너지를 소모하고, 나의 고집을 마모시키는 숭고한 희생을 바탕으로 합니다.

상대를 용서하고 화해의 손을 내미는 일은,

내 마음속에 꼿꼿이 서 있던 자존심과 분노를 지우개처럼 갈아내는 아픔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지우개 가루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단순한 쓰레기가 아니라 '화해의 훈장'처럼 보입니다.

종이 위를 어지럽히던 검은 흑연 가루들을 지우개가 온몸으로 껴안아 뭉쳐진 결정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겪는 수많은 대화와 눈물, 인내의 시간도 이 지우개 가루와 같습니다.

겉보기에는 지저분하고 쓸모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들이 모여 비로소 어두운 과거를 털어내고 맑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게 됩니다. 지우개 가루를 털어내는 손길 끝에는, 이전보다 더 단단해진 신뢰가 남습니다.
​지우개는 완벽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기에 저지를 수 있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틀려도 괜찮다, 다시 쓰면 된다"라고 말하는 듯한 그 뭉툭한 몸체는 우리에게 커다란 위안을 줍니다. 조화로운 세상이란 만점이 가득한 시험지 같은 곳이 아니라, 수없이 지우고 다시 쓴 흔적들이 가득하지만 끝내 아름다운 문장을 완성해 가는 연습장 같은 곳이어야 합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지우개처럼 채워주며, 다시 시작할 기회를 기꺼이 나누는 다정함이 흐르는 곳 말입니다.
​세월이 흘러 작아질 대로 작아진 지우개 토막을 봅니다.

처음의 각진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손가락으로 잡기조차 힘들 정도로 둥글고 작아졌습니다.

하지만 그 작아진 몸집만큼 종이 위에는 수많은 새 기회들이 태어났을 것입니다.

누군가의 틀린 계산을 바로잡아 주었을 것이고, 누군가의 서툰 고백을 다시 쓰게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자신은 비록 소멸해 가지만, 타인의 삶을 더 정갈하게 가꾸어준 그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 향기가 되어 남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서로에게 어떤 존재였을까요? 타인의 잘못을 날카로운 펜으로 그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는 존재였는지, 아니면 지우개처럼 부드럽게 다가가 그들의 아픔을 껴안고 새 도화지를 선물하는 존재였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내가 조금 닳아 없어지더라도 누군가의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순간을 함께 지워줄 수 있다면, 그 삶은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 있는 교향곡이 될 것입니다.
​책상 위를 정리하며 지우개 가루를 쓱 닦아냅니다. 깨끗해진 종이 위에 다시 연필을 가져다 댑니다. 이제는 조금 더 신중하게, 하지만 틀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문장을 이어갑니다.

우리 곁에는 언제든 나를 도와줄 지우개 같은 인연들이 있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비누가 씻어내고, 안경이 보여주고, 우산이 막아주었듯, 지우개는 우리를 다시 시작하게 합니다.

이 낮은 사유의 조각들이 모여, 어제보다 조금 더 맑고 너그러워진 세상의 내일을 그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