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그릇

비워냄으로써 비로소 세상을 품는 포용의 공간

by 현루

​식탁 위에 놓인 빈 '그릇' 하나를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사람들은 흔히 그릇을 볼 때 겉면의 화려한 빛깔이나 매끄러운 감촉, 혹은 그것을 만든 장인의 이름을 먼저 살핍니다.

하지만 그릇의 진짜 본질은 눈에 보이는 단단한 흙이나 사기 재질에 있지 않습니다.

그릇의 가치는 역설적이게도 그 안에 아무것도 채워져 있지 않은 '텅 빈 공간'에서 나옵니다.

무언가를 담기 위해 스스로를 비워둔 그 허공이야말로 그릇이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타인과 조화를 이룬다는 것도 이 그릇의 '비어 있음'을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지식, 경험, 혹은 고집이라는 내용물로 마음을 가득 채운 채 살아갑니다.

이미 가득 차 버린 그릇에는 그 어떤 새로운 물도, 따뜻한 온기도 담길 자리가 없습니다.

진정한 화합은 내 안의 것을 덜어내어 상대방이 들어올 수 있는 '여백'을 만드는 일입니다.

내가 비워진 만큼 상대의 이야기가 담기고, 내가 낮아진 만큼 상대의 진심이 그릇 안에 고여 듭니다.

비어 있다는 것은 부족함이 아니라, 무엇이든 수용할 수 있는 가장 넓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릇은 자신에게 담기는 것들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맑은 물이 담기면 갈증을 달래는 샘이 되고, 뜨거운 국이 담기면 지친 몸을 데우는 위로가 됩니다.

거친 곡식이 담기든 달콤한 과일이 담기든, 그릇은 그저 낮은 곳에서 묵묵히 그것들을 받쳐줄 뿐입니다.

"나는 이것만 담겠다"라고 고집을 부리는 순간, 그릇은 도구로서의 생명을 잃습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화합의 모습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서로 다른 생각, 낯선 문화,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슬픔까지도 기꺼이 품어 안을 수 있는 넉넉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그릇이 되어 타인을 품을 때, 비로소 너와 나라는 경계는 사라지고 '우리'라는 하나의 따뜻한 식탁이 완성됩니다.
​그릇의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훑어봅니다. 부드럽게 굴곡진 그 원형의 선은 담긴 것이 밖으로 넘치지 않게 붙들어주는 경계이자, 그것을 잡는 사람의 손이 다치지 않게 배려하는 부드러움입니다.

조화로운 삶이란 이처럼 자신의 경계를 둥글게 다듬는 일입니다.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진 마음은 타인을 찌르고 상처를 주지만, 둥글게 마감된 그릇 같은 마음은 타인을 안온하게 감싸 안습니다.

또한, 그릇은 담긴 것을 밖으로 흘려보내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이에게 기꺼이 자신을 기울여 그 내용물을 나누어줍니다.

채움에 머물지 않고 나눔으로 나아가는 그 기울임이야말로 그릇이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화합의 자세입니다.
​세월이 흘러 이가 빠지거나 금이 간 그릇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그것을 쓸모없다 여겨 버리곤 하지만, 관조의 시선으로 보면 그 틈새야말로 그릇이 치열하게 살아온 흔적입니다.

뜨거운 열기를 견디고 차가운 냉기를 받아내며, 수없이 많은 손길을 거치는 동안 그릇은 조금씩 마모되고 금이 갑니다.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갈등 없는 매끈한 관계보다, 부딪히고 깨진 자리를 서로의 이해와 용서로 이어 붙인 관계가 더 단단하고 깊은 맛을 냅니다.

금이 간 틈 사이로 스며든 세월의 향기는 그 무엇으로도 흉내 낼 수 없는 숭고한 아름다움을 지닙니다.

완벽함보다는 온전함을, 매끄러움보다는 깊이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가 꿈꾸는 세상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릇은 음식을 다 내어주고 나면 다시 텅 빈 상태로 돌아가 선반 위에 오릅니다.

자신의 공을 자랑하지 않고 다시 침묵 속에서 비워진 채 내일을 기다립니다.

비워져 있기에 다시 채울 수 있고, 채워졌기에 다시 나눌 수 있는 이 순환의 미학은 우리에게 비움의 가치를 일깨워줍니다.

집착하지 않고 흘려보내는 마음, 비어 있어도 허전해하지 않는 그 당당한 고독이 그릇을 가장 그릇답게 만듭니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움켜쥐려고만 했을까요.

손을 펴고 마음을 비워 그릇이 될 때, 비로소 온 세상의 풍경이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요.
​어두워진 주방, 선반 위에 나란히 놓인 그릇들을 봅니다.

크기와 모양은 제각각이지만, 모두가 자신을 비워 무언가를 품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비누가 녹아 향기를 남기고, 안경이 투명하게 세상을 비추며, 우산이 비를 막아주던 그 모든 사유의 조각들이 이제 이 그릇이라는 넓은 그릇 안에 담깁니다.

내가 조금 더 투명해지고, 내가 조금 더 넓게 펼쳐지며, 내가 조금 더 너그럽게 비워진다면, 우리가 마주하는 매일의 식탁은 축복과 화합의 공간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나는 누군가의 마음을 담아주는 그릇이었는지, 아니면 나로만 가득 차 타인을 밀어내는 닫힌 벽이었는지 돌아봅니다. 비워냄으로써 오히려 충만해지는 그릇의 역설을 가슴에 새깁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것을 받쳐주되, 가장 투명한 여백으로 남는 삶. 그런 삶들이 모여 빚어내는 조화로운 세상을 꿈꾸며, 내일 아침 다시 채워 질그릇의 무게를 소중히 기다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