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른손으로 시를 씁니다

05 오른손으로 천천히

by 현루


< 오른손으로 천천히 >

왼손은
이제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손끝으로 스며들던 감각,
그 미세한 떨림마저
고요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 자리에
고요와 무게만이 살고 있다
때로는 그것이 무심한 돌처럼 느껴지고
때로는 내 안에 놓인 낯선 짐처럼
묵직하게 시간을 누른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조심스럽게
오른손에게 세상을 맡긴다

아무 말 없이
내가 주는 모든 것을 받아 안는 손
젓가락 대신 숟가락을 쥐고
치약을 짜고
비누 거품을 내고
리모컨을 눌러 불을 끄고
문고리를 돌려
하루의 출입을 연다

버튼 하나를 누르는 데도
가끔은 숨을 고른다
수건을 펼치는 일,
바지를 벗기는 일,
조그만 약병의 뚜껑을 돌리는 일조차
작은 싸움이 된다

가끔은 흘리고,
가끔은 놓친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다시 천천히
다시 조심스럽게 손을 뻗는다

그 모든 순간이
하루라는 연습장 안에
작은 글씨로 적혀간다

나는 배운다
천천히 하면
괜찮다는 걸
서툴러도
괜찮다는 걸

완벽하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오른손은 말이 없다
그저 묵묵히
내 하루를 떠맡는다

그리고 나는 안다
이 손이
언젠가 익숙해지는 날까지
나는
참을성 있게
나를 돌보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에도
오른손은 조용히
내 삶을 쓰고 있다
아주 느리게,
하지만 분명한 글씨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