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끝나는 길 뿐인가?

당신의 윗도리를 위해 자신의 아랫도리를 태운 여성들에 대한 헌사

by 마혼

<마혼의 Stage & Age 8>


남자는 유부남, 여자는 솔로. 사랑만 안 하면 될 텐데 그럼에도 기어이 사랑하는 남녀는 곧잘 있다. 그러나 사랑한다고 같이 죽어버리는 경우는 곧잘 없다. 그 없는 길의 끝. 그리고 운명의 끝. 그 끝을 선택한 남자 김우진.


그는 문학과 연극을 넘나들던 당대의 유망주였다. ‘극예술협회’의 중심에서 활동했을 뿐 아니라 유랑극단을 만들어 전국을 돌았다. 그러나 그의 천재성은 피기도 전에 지고 말았으니 채 서른이 되기도 전인 1926년, 연인과 함께 바다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다. 그 연인은 바로 윤심덕. 그렇게 그의 생처럼 비극적인 여인의 이야기 ‘이영녀’. 1925년 9월에 탈고된 이 작품은 90년이 지난 2015년에야 무대에 올랐다.


1920년대 일제치하, 목포 유달산 밑의 어느 사창가. 자식이 넷이었다가 하나 죽고 셋 딸린 엄마 이영녀는 먹고 살아야 한다. 아이들도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초장부터 몸팔러 나가고 어린 오누이와 갓난쟁이를 포주가 돌보는 중. 그래서일까, 아이들부터 어지럽다.


아들 : 그래, 너까짓 가시내가 못났지 뭣이여. 가시내는 모두 사내들의 종년이란다. 엄마한테 물어봐라. 안그런가.

딸 : (달려들어 얼굴을 쥐어박으며) 이놈의 새끼, 너하고 나하고 오늘 죽어보자! 자, 종년이다, 어쩔래! 아나!


쥐어맞은 10살 아들은 달래주려는 포주아줌마를 대놓고 가르친다. 이영녀의 삶처럼 이미 애늙은이가 돼버린 아들.


포주 : 아까 예배당 갔을 때 목사님이 이야기한 것 안 잊었지. 천사라고 천당에 있는데 그런 천사는 너같은 아이들을 아주 이뻐한단다.

아들 : 엄마는 천당이 없다고 그러던데. (중략) 예배당에서 목사님이 하는 소리는 모두 거짓말이라고.


그렇게 또 하루 지옥길을 걷다 집에 돌아온 영녀는 말도 안되는 손님을 치르고 온 탓에 지칠대로 지쳤는데 이내 집으로 경찰이 찾아온다. 밀매음 죄목으로 구류 30일. 그리고 감옥서 나온 영녀는 경찰서장의 소개로 친일파 부호인 강 참사의 행랑방에서 기거하며 동시에 강참사가 경영하는 면화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게 된다. 그러나 공장일이 어디 쉽던가. 사내 피하는 일은 어디 쉽던가. 어여쁜 영녀에겐 붙어사는 아줌마의 경고도 소귀에 경 읽기요 사치.


아줌마 : 그저 사내놈이란 것은 가까이 하지를 말어. 한 번 그놈들 눈에 띄면 진날 개 사귀는 셈이야. 나중엔 주먹으로나 안 맞으면 다행이지.


그러나 개돼지 같이 생긴 놈한테 개돼지처럼 피와 살과 몸을 빨리던 영녀는 마침내 공장에서도 집에서도 쫒겨난다. 마침 또 집나간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도 전해져온다. 지난 겨울 갓난쟁이도 죽어 오누이 둘만 남은 엄마 영녀는 그 둘이라도 가르쳐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지긋지긋한 남자를 또 만나야 한다. 그래서 흘러 흘러 빈민굴 노동자 유서방을 만나 동거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영녀의 아랫도리. 매춘을 그만두고 잘살아지나 했을 터. 하지만 혼자 일 나가는게 못내 억울한 유서방은 하필이면 색욕을 못 참는 놈이라 시름시름 앓고 있는데도 영녀를 덮치기 일쑤. 그리고 말 안들으면 주먹질이다. 하루하루가 매춘 아닌 매춘에 폭력까지 더해진다. 그렇게 영녀는 아랫도리가 남아나질 않게 되고 끝내 윗도리마저 식어간다. 자식들을 남겨둔 채 빈민굴에서.


그리고.


‘당신을 사랑해요. 그 누구보다.’

오글거리는 꽃말을 가진 동백꽃은, 때문인지 그 자체로 흐드러지는 사치다. 강종열의 동백연작에서 느껴지는 장미보다 진한 관능. 그래서 동백꽃은 여인의 아이콘이 된걸까. ‘춘희 La Dame aux camélias’. 얼핏 봄 여자 같지만 원제 La Dame aux camélias가 ‘동백의 여인’이라는 뜻이라 일본에선 동백나무 ‘춘 椿’자를 붙인 것. 문제는 이 ‘춘 椿’자가 우리나라서는 참죽나무를 뜻한다는 사실. 그래서 ‘동백꽃여인’이 맞는 제목인데 극중 마르그리뜨의 별명 ‘동백꽃을 들고 있는 여인’에서 따온 것.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는 그 유명한 ‘삼총사’와 ‘몬테크리스토백작’ 등을 쓴 알렉상드르 뒤마의 아들로 2대에 걸친 천재들 되시겠다. 프레보의 ‘마농레스꼬’의 오마주. 그가 1848년 소설로 썼다가 희곡으로 개작, 몇 년 뒤엔 연극으로 사람들 줄세우더니 나중엔 베르디가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로 만들기도 했던 작품.


빠리. 밤마다 극장을 맴도는 그녀의 이름은 마르그리뜨, 직업은 코르티잔. 그리고 귀족청년 아르망. 둘은 만남부터가 한 편의 연극. 연극을 상연하는 극장에서 그녀에게 반한 아르망은 마침 그녀 옆집에 초대되어 갔는데 이미 자기 집에 와있던 백작을 내쫒고 싶은 그녀는 역할 대행을 의뢰한다. 손님 역으로 방문연기를 하는 아르망. 작전은 성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그 날 마르그리뜨는 피를 토한다. 불치의 폐병을 앓고 있는 그녀. 그럼에도 아르망은 마음을 온통 빼앗긴 댓가로 뭔가를 연신 받는다. 그날은 진한 동백꽃 한 송이. 두 번째 방문에선 그녀의 집 열쇠, 그리고 그 다음엔 그녀의 지령.


‘명령이예요. 오늘 밤 보드빌 극장으로. 제3막 막간 시간에요.’


그렇게 축복의 은사를 받듯 마음을 챙겨받은 아르망은 그녀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든다. 사랑이 제대로 깊어진 둘은 마침내 교외에 따로 거처를 얻는다. 물론 그녀의 고객이었던 귀족의 돈으로. 하지만 얼마 안가 동거가 들통나자 공작은 후원을 끊겠다며 협박한다. 점차 쇠약해지는 그녀는 시간이 얼마 없다. 그래서일까. 마르그리뜨는 불안하다. 갚을 돈도 많은데 말이다.


“미안해요. 그저 이렇게 바람이 심하게 불 땐 신경이 날카로워져요. 그래서 무심코 마음에 없는 말을 하게 돼요.”


설상가상, 비행기타고 서울서 전라도 가는 꼴이 돼버리는데 행복에 올라타자마자 내려야 하는 일이 생긴다. 아르망의 아버지가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아버지 : 모든 남자와 관계를 맺은 여자의 남편으로 사는게 명예냐?

아르망 : 이제부터 아무하고 관계 맺지 않으면 되잖습니까! 회개하면 되잖아요!


아르망은 아버지를 이겨보려 하지만 마르그리뜨는 끝내 그를 떠난다. 백작을 다시 만나 빚도 청산하고 화류계의 여신으로 부활했단다. 참았다는 듯 밤마다 외출 나간다는 소문까지 듣게 된 아르망은 복수를 결심한다. 그녀의 여사친을 애써 정부로 삼더니 파티마다 얼굴을 내밀며 그녀를 모욕한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빙글빙글 웃어댄다. 불타는 사랑을 한순간에 유치한 본전생각으로 메워넣는 아르망. 결국 괴로운지 그녀는 영국으로 떠나며 일기를 남긴다. 둘의 모든 지난 날이 담긴.


‘아버님께서 몰래 오셨어요. 헤어져달라고 말씀하셨어요. 저와 당신이 엮인 소문 때문에 당신의 여동생이 혼사가 깨질 위기라고 하시더군요.’

.......

‘열이 심했지만 죽은 사람 같은 얼굴을 감추려 화장을 하고 당신을 만났던 극장에 왔어요. 당신이 앉았던 자리만 쳐다봤어요.’

.......

‘당신이 매일같이 절 모욕하고 있지만 전 기쁜 마음으로 받고 있어요. 당신이 여전히 절 사랑한다는 증거니까요.’

.......

‘사랑을 돈으로 사려는 사람은 상품을 잘 살펴보는 법이죠. 전 이제 병이 악화되어 잊혀진 존재입니다. 돈이 없어 매일 채권자들이 집 앞에 와요.’

........

‘백작에게서 돈이 오지만 전 받지 않았어요. 그 분 때문에 당신이 내 옆에 없으니까요. 아, 즐거웠던 당신과의 나날!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시나요?’

.......

‘생이 얼마 남지 않은게 느껴져요. 아버님의 말을 들은 것이 지금은 후회돼요.’

.......

‘어떤 일이 있든, 전 지금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렇게 그녀는 평생 아랫도리만 태우다 아르망의 윗도리를 덥혀놓고 끝내 타국에서 죽음을 맞는다. 사랑을 남겨놓고 가는 그 없는 길 끝. 적어도 가다가 자꾸 뒤돌아보게 될 것 같은.


자, 그럼 당신은? 당신의 윗도리는 따뜻해졌는가? 후우, 어쨌든 그 없는 길 끝으로만 가지 않으면 될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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