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그 등불 좀...”

빛 하나에 울고 웃는 여자들에 관한 미셀러니

by 마혼

<마혼의 Stage & Age 5>


white, 진실과 순결의 상징. 그리고 그 순결은 빛을 받아 더 하얗게 되는 법. 그러나 그녀는 빛을 거부한다. 그 하얀 이름 ‘블랑쉬’가 상징하는 품위로 둘러싸인 허상, 그리고 ‘스탠리’로 상징되는 가혹하고 야만스러운 현실은 물과 기름이다. 그래서 뼈를 때린다. 그렇게 뼈때렸다고 테네시 윌리엄스에게 퓰리처상을 안겨준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1947년 엘리아 카잔 연출, 말론 브란도 주연(영화 아님에 주의)으로 뉴욕에서 프리미어 때렸다. 우리나라에서도 1955년 극단 신협이 올릴 때 극장문이 부서질 정도였는데 6일만에 만 명이 관람했다니 보려는 욕망 또한 대단했다고 봐줘야할 듯.


명문가 출신에 학교 영어선생이었던 블랑쉬. 허나 지금은 집과 땅, 가족 모든 걸 잃고 쇠락한 처지. 그럼에도 흰 정장에 진주목걸이, 흰 모자까지 장착한 그녀는 제목 그대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미국 남부 항구도시 뉴올리언즈에 도착한다. 동생 스텔라 집에 빌붙으러 가는 길. 그러나 이 곳 역시 쇠락한 도시에 쇠락한 동생.


유일하게 에너지가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동생의 남편 스탠리. 그러나 그 역시 코로나 돌려세울 정도의 변이를 갖고 있으니, 폴란드 출신의 다혈질에 술과 도박을 즐기고 임신한 스텔라를 블랑쉬가 보는 앞에서 때리기까지 한다. 그래서 둘은 보자마자 서로가 싫다. 블랑쉬는 구름위에 있고, 스탠리는 땅을 밣고 있기 때문. 그래서인지 스탠리는 그 자매가 살던 땅과 집을 블랑쉬가 빼돌렸다고 의심한다. 그러자 블랑쉬는 가방을 연다. 그러나 이를 보고 의심만 더욱 짙어진 스탠리. 뒷조사를 감행한다. 옷과 보석과 서류들로 가득 찬 가방.


그러나 정작 블랑쉬는 이제 텅 빈 가슴만 남았다. 그 텅 빈 속을 낯선 남자들의 살결로만 채워오던 그녀는, 정작 밝게 채워지는 등불이 싫어 동생의 집에 오자마자 전등에 종이를 쑤셔박아버린다. 그리고 스텔라에게도 서슴없이 경고한다. 스탠리는 짐승이며 유인원에 불과하다고. 이를 우연히 또 듣게 된 스탠리는 이를 간다.


한편 스탠리의 군대친구 미치는 비교적 온순한 총각. 서로는 끌리고 데이트도 나간다. 블랑쉬는 그를, 여기서 꺼내줄 구원자로 믿고 어린 시절 첫 남편이 권총자살한 사실까지 털어놓는다. 그 총구의 불빛을 본 때부터 빛을 거부한 그녀. 그래서 이런 미치조차 낮에는 만나주지 않는 블랑쉬.


미 치 : 블랑쉬, 당신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요. 여기 불 좀 켭시다.

블랑쉬 : 불이요? 무슨 불을요? 뭣 때문에요?


미치라는 오아시스도 블랑쉬에겐 사치였던 걸까. 스탠리의 수소문이 성과를 가져왔다. 블랑쉬가 17살 제자와 정을 통한 것이 들통나 학교에서 잘린 일, 그리고 그녀의 화려한 남성편력 모두가 들통난다. 블랑쉬의 생일날, 미치는 오지않을 것이라며 그녀에게 생일선물로 차표를 주는 스탠리. 떠나란다.


그리고 엎친 데 덮친다. 스텔라가 아이를 출산하러 병원에 간 사이, 스탠리는 아직 집에 남아있던 처형 블랑쉬를 강간하고 정신병원에 신고한다. 그녀는 정말 제정신으론 버틸 수 없는 세상끝까지 왔다. 며칠 후, 스텔라의 집앞에서 기다리는 의사와 간호사. 스탠리는 결국 등불에서 종이를 찢어내고 블랑쉬는 살이 찢기듯 비명을 지른다. 따라나서기를 거부하던 블랑쉬는 의사가 작전을 바꿔 신사처럼 행동하자 그제야 팔짱을 끼고 따라나선다. 그녀가 가렸던 등불 때문일까,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끝내 더 어두운 곳을 향한다.


블랑쉬 : (의사에게 바짝 붙어) 당신이 누구든, 난 늘 낯선 사람의 친절에 의지해왔거든요.


그리고.


내가 쓴 대본을 봉준호감독이 영화로 만든다고 한다...

이런 여러분의 상상을 현실로 맞닥뜨린 작가가 한 명 있었으니 패트릭 해밀튼 Patrick Hamilton. 금세기 초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소설가요 희곡작가이다. 그가 쓴 희곡 ‘밧줄’이 당시 당대의 명장 알프레드 히치콕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으니 나름 복받은 작가라 할 터. 지금은 그의 더 유명한 작품 ‘가스등 Gaslight’. 1938년 런던에서 초연 올라갔다.


결혼 5년차의 유복한 중산층 집안 부인 벨라 매닝햄. 최근 큰 저택으로 이사했고, 달달한 남편 잭 매닝햄이 옆에 있다. 다만 종종 김빠지는 일이 생겨버리는데 그 첫 번째. 멀쩡히 벽에 걸려있던 그림이 하루아침에 사라진다. 하녀들까지 불러 추궁해보지만 그림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잭의 계산서. 서랍에 있었는데 없어진다.


이렇듯 벨라가 물건을 엉뚱한 데 놔두거나 잃어버리는 데다 기억도 못하는 일이 시나브로 생기기 시작한다. 그녀는 어지러워져만 간다. 급기야 벨라는 남편이 없을 때만 자꾸 다락방에서 발자국소리가 나고 그때마다 가스등이 어두워진다며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남편 잭은 그녀를 위로하기보다는 승질만 낸다. 물건이 다른 데로 옮겨지거나 잃어버리는 일이 반복되자 짜증이 찬다. 급기야 정신병원 이야기까지 꺼내며 그녀를 몰아세운다. 그녀의 엄마가 젊었을 때 정신병을 앓다 죽은 일을 상기시키며 당신도 똑같은 거라고 벨라의 멘탈을 이쑤시개로 후벼파기 시작한다. 벨라는 자꾸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고 정작 똥 싸듯 말을 싸지른 잭은 바람을 쏘이겠다며 밤마다 혼자 외출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집으로 한 남자가 찾아온다. 로우그라는 형사. 로우그는 자기가 풋내기 시절부터 계속 흥미를 갖는 어느 사건에 대해 말을 꺼낸다. 어느 부잣집 마나님이 집에서 살해당했는데 범인은 보석을 찾는 듯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고 사라졌었다는 야그. 문제는 지금 벨라가 이사온 집이 그 집이며 보석은 이 집 어딘가 숨겨져있어 범인은 아직도 틈만 나면 이 집에 들어와 보석을 찾고 있을 거라는 스토리다.


이런 로우그의 심증에 벨라의 증언이 더해져 퍼즐이 맞춰진다. 안그래도 밤마다 위에서 발자국소리가 나고 그럴 때마다 1층 가스등이 약해진다는... 가스등을 누군가 더 켠다는 뜻. 확신에 찬 로우그는 심약해진 벨라를 대신해 복수의 흑기사가 되어준다.


로우그 : (여전히 방 한 쪽을 응시하며) 아, 난 또 누군가 했더니 옛날에 이 집에 살던 바로 그 늙은 노파의 유 령이로군 그래.

잭 : 당신 정말 미친 거 아니오?


그 범인은 바로, 이름을 바꾸고 벨라와 결혼한 잭 매닝햄. 없어지는 물건들 모두 잭이 벌인 일이며 외출하는 척 밤마다 다락방을 뒤져왔던 개쉐이 되시겠다. 로우그는 그를 결박하고 잠시 자리를 비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잭. 칼을 가져와 어서 밧줄을 풀어달란다. 시키는 대로 하는 벨라. 그러나 칼을 칼집에서 꺼내는 순간, 거기서 떨어지는 계산서. 똥 삼킨 얼굴의 잭. 마지막으로 그녀는... 잭의 가스등이 꺼졌음을 알리며 그를 감옥으로 보낸다.


벨라 : 이 밤이야말로 일생 영원히 못 잊을 경이로운 밤이 될 거예요! 다시는 오지 않을, 다시는 와서도 안 될 경이로운 밤이요!


이래서, 오늘날 우리를 온통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만들어버린 단어 ‘가스라이팅’의 유래가 여기서 나왔다.


자, 그럼 당신은? 등이 싫은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이런 등, 켜본 적 있는가? 혹시라도 켜놓은게 있다면... 그만 끌텐가?

이전 06화“나 건들지 마, 환자라구 환자!”